시집에서 읽은 시

바깥들/ 원구식

검지 정숙자 2023. 11. 9. 02:07

 

    바깥들

 

     원구식

 

 

  최초의 책은 아마도 하늘에서 내려와

  돌 위에 새겨졌을 것이다. 일곱 개의 별이 박힌 이 책을

  사람들이 무덤으로 삼았으니, 책이 어찌하여

  별의 부적이 아니겠느냐? 산 자들이

  그 앞에서 죽은 자들을 장사지내고, 열흘 밤

  열흘 낮 동안 점을 친다. 무서울 정도로 단순한

  나의 애인아. 진정한 삶은 이 세상에 없다.

  몽매한 현자들이 점토판의 진흙이 굳기도 전에

  쐐기로 제 두 눈을 찌르고, 하늘의 문자를 모방하여

  불멸의 책을 구워냈으나, 살아서

  돌아온 자가 없다. 그러나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고색창연한 먼지로 뒤덮인 도서관의 책들을.

  형이상학으로 가득한 이 책들은 온통

  호명을 기다리는 죽은 아버지들의 이름들뿐!

  도둑처럼 날이 저물고, 생각 없는 별이 뜬다.

  골짜기의 백합보다 순결한 내 애인이 산 자와

  죽은 자를 중개하는 밤이 왔다. 죽음으로 봉인된

  책이 열린다. 오, 존재가 사라진 공간 속으로

  날아오르는 흑조들. 그 뒤로 죽은 아버지들이

  전쟁 포로처럼 돌아온다. 이곳은 '바깥'들이 모인 '바깥'의 

  바깥들. 존재 없는 존재자들이 사는 곳. 죽은 자들이

  산 자를 낳는 곳. 사물들이 모두 거울이 되는 곳.

  나는 흑조를 쫓아 절벽 끝까지 내달린다.

  순간 절벽이 나를 비추고 흑조가 나를 비춘다. 번쩍번쩍

  비추는 대로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내 오늘 밤

  저 낭떠러지 아래로 몸을 던져 허공에 떠

  유물론자와 물질주의자의 차이를 제법 유치하게

  말해줄 수도 있지만, 애인이 서둘러 책을 덮는다.

  최초의 아버지들이 미지의 행간 속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도서관엔 아직도 먼지를 털어내며 읽어야 할 책들이 수북하다.

  옜다, 너도 한 권 가져다가 저잣거리에서

  비린내 나는 생선이라도 한 마리 바꿔 먹으렴.

    -전문-

 

  해설> 한 문장: "너도 한 권 가져다가 저잣거리에서/ 비린내 나는 생선이라도 한 마리 바꿔 먹으렴"에서 우리는 시집이 오늘날 어떤 운명에 처해 있는지 시인이 모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어렵잖게 확인한다. 독자들을 향한 작가의 "투기사업"1)을 두고 "가장 진실하고 행동적인 문학의 도의 최후의 시금석이 힘든 짓을 해내자니 성서는 벌써 살코기로 바꾸었을 것이다"2)라는 한국문학사의 한 통렬함과 상통하는 「바깥들」의 마지막 구절은 독자들에게 시인의 시니컬한 목소리로 전달되지 않을 수 없다. "쐐기로 제 두 눈을 찌르고, 하늘의 문자를 모방하여/ 불멸의 책을 구워"낸 이 몽매한 현자들 가운데 "살아서/ 돌아온 자가 없다." 우리가 읽은 책들 속엔 "호명을 기다리는 죽은 아버지들"뿐, 독서를 통해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전쟁포로"처럼 되돌아온 저 죽은 아버지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패배적인 비유들과 자조적인 목소리를 뜷고 나오는 다른 목소리 또한 듣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고색창연한 먼지로 뒤덮인 도서관의 책들을." "울지 마라. 모두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도서관엔 아직도 먼지를 털어내며 읽어야 할 책들이 수북하다." 그러니까 우리는 시니컬한 목소리가 뚜렷하게 울리는 목소리와 대조되는, 저 몽매한 현자의 길을 따라가고자 하는 '시인-돈키호테'의 의지 또한 또렷하게 감지한다. 나중에 울리는 목소리에 따르면 '시인-돈키호테'는 저 길이 몽매한 길임을, 불가능한 길임을, 전쟁포로의 길임에도 불구하고 제 두 눈을 찌르며 '고작' 한 권의 책으로 정리된 어떤 세계로 나아간다. (p. 시 16-17/ 론 139-140) (양순모/ 문학평론가)

 

   1) 이상, 「문학과 정치」(『사해공론』1938. 7.), 『이상 전집 4』, 태학사, 2013, 140쪽. 『』

   2) 이상, 「문학을 버리고 문화를 상상할 수 없다」(⟪조선중앙일보⟫ `936. 1. 6.)위의 책, 35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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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오리진』 에서/ 2023. 10. 30. <한국문연> 펴냄

   * 원구식 경기 연천 출생, 197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먼지와의 싸움은 끝이 없다』『마돈나를 위하여』『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