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가는 것들은 다 진한 향기를 가졌다/ 이현서
흘러가는 것들은 다 진한 향기를 가졌다
이현서
구원에는 마지막 바람이 불었다
중력에 몸을 던진 열매들 후드득 후드득
먼 길 걸어온 발자국들이 편애하는 방향으로 뛰어내렸다
수몰된 골짜기에서 두고 온 마음이 말갛게 눈을 떴다
상한 영혼이 갈피마다 허공을 거느린
시린 바람에게서 꽃의 부음을 듣는다
불이었다가 물이었다가 바람이 된 천년의 사랑도
노을이 지기 전 까마득한 절벽에서 뛰어내렸다
또 다른 생을 위해 떠나는 발자국들
부딪히고 발효되어 빛나는 상처마다 고인 울음을 안고
바람 소리로 저문 목숨의 빛깔들
밤의 목책에 따라
아득히 바람결에 묻어나는 물안개와 골짜기의 물소리
흘러가는 것들은 다 진한 향기를 가졌다
붉은 화인이 찍힌 가슴마다 흘러내리는 가을
아득해서 더욱 간절한 향기로 다가오는
-전문-
해설> 한 문장: "흘러가는 것들"이라는 제목 속에 시적 화자의 인식의 변화와 갱신이 담겨 있는데, 그것은 자아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타자들의 존재에 대해 자각하기 시작했으며, 무한성에 대한 관심에서 벗어나 유한성에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남의 부재로 상실감에 저해 있는 자아에서 그러한 처지에 있는 타자들에게 눈을 돌리게 되었다는 것이며, 그렇게 눈을 돌리고 보니까 타자들은 모두 그러한 결핍과 결여를 지닌 유한한 존재라는 자각에 도달하게 되는 셈이다. "중력에 몸을 던진 열매들 후두둑 후두둑"이라는 표현 속에 그러한 사정이 응축되어 있는데, 이러한 시구에는 모든 존재들은 중력의 자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 그래서 그러한 중력의 영향으로 유한한 시간만을 향유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 등에 대한 인식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유한성과 상대성에 함몰되어 있는 것이 존재의 본질이라는 이러한 인식은 타자의 처지에 대한 연민과 공감을 이끌어내는데, "상한 영혼의 갈피마다 허공을 거느린/ 시린 바람에게서 꽃의 부음을 듣는다"는 표현이 그러한 시적 인식을 응축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에는 모든 소멸하는 것에 대한 연민과 공감의 언어가 스며있기 때문이다. 시인이 추구했던 영원한 사랑인 "천년의 사랑" 또한 그 무한성을 벗고 유한성과 순간성으로 탈바꿈하고 마는데, "불이었다가 물이었다가 바람이 된 천년의 사랑도/ 노을이 지기 전 까마득한 절벽에서 뛰어내렸다"는 구절이 그러한 시적 인식을 담고 있다. 불에서 물로, 그리고 다시 바람으로 변모하는 사랑이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 되고 마는데, 그래서 그러한 사랑도 중력의 자장에 끌려가는 것은 어쩔 수 없게 되는 것이다. (p. 시 102-103/ 론 157-158) (황치복/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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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어제의 심장에 돋는 새파란 시간들』 에서/ 2023. 10. 6. <미네르바> 펴냄
* 이현서(본명, 이영숙)/ 경북 청도 출생, 1996년 계간『문예한국』 신인상 수상 & 2009년 계간『미네르바』로 등단, 시집『구름무늬 경첩을 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