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어스름 창가에 기대어 문득/ 이경우
검지 정숙자
2023. 10. 28. 19:47
어스름 창가에 기대어 문득
이경우
어느 날 아침 텃밭에서 만난 벌레 한 마리
가늘고 기다란 생의 두 자침으로
세상을 두드리며
제 식구들 근심 구하러 집을 나선,
온전히 맨발이었던 그 벌레
뻗으면 손 닿을 곳에서 하루 벌어
하루 버티며 혼돈의 이 시대를 견디는
또 다른 내 이웃이라는 생각에
나는 저녁이면 창을 열어 늦었을지 모를
그의 귀갓길을 밝혀 주고는 하였는데
온 세상 한가득 연둣빛 찬란한 이 봄날 저녁
그림자 길어진 내가
자연의 철학자도 아닌 내가 새삼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원인이 있다는 말을 실감하여
일상의 끈 위에서 뛰어내려
카미노 데 산티아고 순례길을 떠나고 싶어진다
영원한 줄만 알고 함부로
낭비해 버린 내 삶의 번 아웃에 빠져버린 내가
눈물로 떠났다가
웃으며 돌아온다는 그곳을 향해.
-전문(p. 180-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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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사사』 2023-여름(114)호 <시사사 포커스 2/ 신작시> 에서
* 이경우/ 2004년 『시사사』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