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시인 외 1편/ 김남호

검지 정숙자 2023. 10. 21. 02:20

 

    시인 외 1편

 

     김남호

 

 

  그때는 거지가 많았어

  밥때만 되면 사립문 앞에 거지가 서 있었어

  그들은 지상에서 가장 힘겨운 모습으로

  하루와 하루 사이를 문전에서

  문전으로 이어 가고 있었어

  그 거지도 그랬어

  육 척의 큰 키에 사철 검은 외투를 걸치고 있었어

  우리는 그를 키 큰 거지라 불렀어

  밥을 달라고 구걸하는 법도

  안 준다고 욕하는 법도 없었어

  주인이 나오는 동안 그는 묵묵히 서 있거나

  땅바닥에 무언가를 쓰고 있었어

  식은 밥 한 덩이를 주면 품속 보자기에 넣으며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로, 고맙습니다!

  돌아서서 가는 그의 뒷모습은

  그의 몸에서 나는 쉰내처럼 서러웠어

  더러는 그가 공부를 너무 많이 해서

  헤까닥 돌아 버린 거라고 혀를 찼고

  더러는 그가 유명한 시인이었다며 킬킬거렸어

  나는 그가 시인이었으면 했어

  그래서 그가 앉았던 자리를 유심히 살피곤 했어

  그때는 그랬다는 거지 지금 시골에 그런 거지가 어딨어?

  그런데 사십 년도 더 지난 지난겨울에

  고향에 잠시 들렀다가 그 거지를 만났어

  울타리도 무너지고 지붕도 주저앉은

  고향 집 사립문 앞에

  시커먼 코트를 입은 그 거지가

  유행 지난 시를 우물거리며 서 있었어

  밥때도 지났는데

  식은 밥 퍼 줄 엄마는 요양원에 계신데

  어쩌자고 글썽이며 쉰내 나는

  시만 우물거리고 있었어

      -전문(p. 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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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문다는 말

 

 

  저문다는 말에는 땅거미가 지지

  나를 지나 내 뒤쪽으로 뒤뚱뒤뚱 사라지는

  털이 부숭부숭한 거대한 거미가 있지

 

  저문다는 말에는 발소리가 들리지

  발자국은 없고 발소리만 들리지

 

  멀고 먼 북천의 언저리에서

  되새 떼처럼 내려와 수런거리다가

  귀 기울이면 감감해져 버리는

  자박자박 흙마당 밟는 소리 들리지

 

  저문다는 말에는 거지가 있지

  부르는 것도 아니고 안 부르는 것도 아닌

  혹시나 싶어 사립문 열고 내다보면  

  식은 밥처럼 서 있는 내가 있지

 

  저문다는 말에는 엄마가 있지

  막내를 부르는 엄마의 꼬리 긴 모음이 있지

  모음만 있지 아야 어여 날은 저문데

      -전문(p.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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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말하자면 길지만』에서/ 2023. 10. 15. <파란> 펴냄

  * 김남호/ 1961년 경남 하동 출생, 2002년『현대시문학』으로 평론 부문 & 2005년『시작』으로 시 부문 등단, 시집『링 위의 돼지』『고래의 편두통』『두근거리는 북쪽』등, 디카시집『고단한 잠』, 평론집『불통으로 소통하기』『깊고 푸른 고백』, 현)박경리문학관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