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냉장고/ 김정수

검지 정숙자 2023. 10. 16. 22:28

 

    냉장고

 

     김정수

 

 

  냉장고는 여명  황혼 궤도를 따라 지구 주위를 돌고 있다. 태양은 왼뺨으로 지고 오른뺨에서 떠오른다. 일정한 속도와 간격으로 보기만 했는데 뺨을 내주는 것은 일방적이다. 내 주위를 도는 얼굴은 다 겉만 번지르르하다. 반듯한 태도를 충전할 수 없으면 순서 없이 갈등이 불거져 꿈을 잠가야 한다. 미처 날개가 도달하지 못한 아득한 고도에서 시간은 오늘과 내일의 중간쯤 박제되어 있다. 우리는 어느 결에 이분법을 저장했을까. 적도와 교차한 명암은 얼룩무늬 혜성이 곤두박질치지 않는 한 변하지 않는다. 지구는 냉장고 속에 반반으로 들어있다. 냉동된 대륙의 겨울이 녹아 발밑에 흥건하다.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은 간빙기와 빙하기가 발견된다. 황혼과 여명 사이에서 썩거나 유통기한이 지난 사랑이 궤도에서 이탈한 걸 이별이라 부를 수 있을까. 밤과 낮의 경계에선 음흉한 그림자가 좌우를 넘나든다. 최적의 조건이다. 오래된 냉장고는 가끔 불길에 휩싸인다. 방화는 한적하다. 냉장고 이전의 냉장고는 뜨거운 사과 속에 있고 홍염이 정점에 이르러 움직이지 않을 때 사과는 익어간다. 손금 없는 손바닥 위에선 파란 얼음이 타오르고 궤도를 이탈한 반쪽의 달을 냉동실에 넣으면 어둠은 무수히 많은 별을 꺼내 은하의 시장에 유통한다. 태양에서 사과의 흑점을 꺼내도 냉장고의 체온은 떨어지지 않는다. 벗어날 수 없는 높이와 배후에는 어둠의 빛이 고여 있다.

    -전문(p. 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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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토포스』 2023-여름(2)호 <신작시> 에서

  * 김정수/ 1990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홀연, 선잠』『하늘로 가는 혀』『서랍 속의 사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