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추상화 또는 세밀화 외 1편/ 염민숙

검지 정숙자 2023. 10. 3. 02:17

 

    추상화 또는 세밀화 외 1편

 

     염민숙

 

 

  너와 답 없는 끝말잇기를 한다

 

  식탁 의자로 탁자를 내리쳤다

 

  유리 탁자가 왕창 깨졌다

 

  내가 말을 잇는다

 

  겹으로 된 유리는 더욱 결속하며 금이 간다

 

  네가 말을 받는다

 

  금과 금이 겹치고 결속하며

  세밀화로 바뀐다

 

  세밀화에 세밀화를 겹치면

  집이 말할 수 없이 깜깜해졌다

 

  한가운데 물이라도 담길 것처럼 집이 텅 비었다

 

  너와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네가 퇴장했다

  내가 퇴장했다

 

  그림자들이 결별했다

     -전문(p. 78-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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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룡알

 

 

  보성에서 대구까지 공룡알 24개 34만 원

 

  화물 앱에 뜬 공룡알은 실으러 갔다 고속도로 지나면서 침공 외계인 기지같이 들판에 쌓아둔 게 무언가 했었다

 

  집에서 소 한 마리를 기를 때만 해도 노동의 종말이 무언지 몰랐다 벼를 베면 아이들까지 나가 볏단을 모으고 탈곡기로 털어 벼를 찧었다 요즘은 트랙터 한 대가 사부작 사부작 베는 순간 벼는 털리고 볏집은 비닐로 싸매 공룡알로 남긴다는 거다

 

  농부가 트랙터로 공룡알 2개씩을 안아 내려 우사 곁에 쌓는다 눈발 날리는 한적한 우사에 들어선 소들이 눈망울을 끔벅이고 있다 콧김을 뿜으며 알 속에서 발효된 짚을 씹고 있다

 

  미래에는 동물을 기르지 않고 배양실에서 만든 고기를 먹게 될 것이라 한다. 공룡알이 화물트럭이 갈 데가 없어 콧김 뿜을 때가 오는 거다

    -전문(p. 92)

 

    * 공룡알: 곤포梱包 사일리지silace. 비닐로 꽁꽁 포장하여 놓은 소 사료용 볏짚. 무게는 개당 400㎏ 정도로 공기가 차단되어 물에 빠져도 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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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오늘을 여는 건 여기까지』에서/ 2023. 9. 13. <상상인> 펴냄  

   * 염민숙/ 2015년 ⟪머니투데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시라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