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가죽 공예가 외 1편/ 수경

검지 정숙자 2023. 9. 18. 02:19

 

    가죽 공예가 외 1편

 

     수경

 

 

  한 공예가가 있었다 

 

  어떤 것도 그가 두들기고 잘라내면 가죽 이전의 시간으로 돌아갔다 피를 없애고 되살아나지 못하게 해서 장인이 될 수 잇었다 말리고 저미고 찢어서 최상품이 되었다 가죽 이후는 공예가의 손을 따라 달라졌고

 

  공예가는 시간도 가죽처럼 다퉜다

 

  가죽을 두들겨 짐승이 갖고 있던 마지막 피를 그 짐승의 가죽에 먹일 때 악어들이 사슴을 끌어안고 물로 들어간 나일강에서 피가 튀었다 송아지의 뒷발은 구두 뒤축 장식으로 들어갔다 짐승의 시간이 사람의 시간 속에서 걸러 다녔고

  모든 것이 그의 기술이었다

  공예가는 두들긴 가죽을 꽃처럼 다뤘다

 

  가죽이 뜨거워지면 꽃의 형질을 뱉었다 맨드라미에 뜨거움이 닿자 가죽에서 꽃의 시간이 우려졌고

  나는 공예가처럼 단숨에 핏빛을 마셨다

  꽃차 이전의 시간을 잘라냈다

 

  가죽 공예가가 죽던 날 가죽 이전의 시간들은 꽃의 시간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꽃차를 마시기 전의 나로는 되돌아가지 않았다

    -전문(p. 5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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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생식물

 

 

  근린공원을 개장하면서 사람들은 낮이나 밤이나 몽글몽글 모여든다 부유하기 좋은 곳이라서 뿌리를 내리는 모래가 있고 날 수 없는 그네가 있다 낯선 얼굴이 풀밭에서 불쑥 자라나고 연못에 둥둥 떠 있는 식물에서 하필 오빠가 떠올랐다 

 

  직장을 수시로 바꾸면서 좀체 자리를 잡지 못했다 사는 일조차도 탐탁지 않았는지 일상을 부유하던 오빠는 서른다섯 여름을 벗어났다 엄마는 열두 손가락 중 하나가 잘려 아파했다

 

  물은 안팎으로 구분되지 않지만 수생식물은 물이라는 피부를 통해 죽은 듯 살아 있다 그리스 어느 거리 오렌지가 얼굴처럼 열려 있던 풍경이 떠올라

 

  연못에 얼굴을 들이밀고 오빠, 나는 이제 시에서 벗어나고 싶어 외치면 희멀건 얼굴을 한 오빠는 내게 말하겠지 동생아, 수중도시에서 얼굴은 가로등처럼 떠 있을 뿐이란다 물에서 불지 않은 얼굴이 있다면 수생식물이겠지 죽은 듯

 

  떠 있으렴

 

  오빠는 지금도 여름을 부유하고 있어?

     -전문(p.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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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첫 시집 『딸기독화살개구리』에서/ 2023. 9. 10. <시산맥사> 펴냄  

  * 수경(본명, 정수경)/ 1969년 전남 보성 출생, 2020년 웹진『시인광장』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