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두언

상상력과 체험(부분)/ 송기한

검지 정숙자 2023. 8. 21. 01:40

<상상인 프롤로그> 에서

 

    상상력과 체험(부분)

 

    송기한

 

 

  문학이 근대 사회로 들어오면서 소위 근대성의 제반 논리와 결부되면서 서구적 의미의 자율성이 새삼 강조되었던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그것은 시의 근대화 과정과 분리할 수 없었는데, 특히 시의 경우에 있어서는 자유시형의 형성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무목적이 합목적성'이라는 칸트적 예술의 자율성에 근거한 것이었다. 오히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는데, 바로 시의 내용이 함의하고 있는 근대성 내지는 현대성의 문제였다. 가령, 시의 계보를 체험의 영역에 둘 것인가, 아니면 자율성에 기반한 상상력에 둘 것인가를 기준으로 시의 현대성이랄까 근대성을 문제 삼았던 것이다. 전자를 대표하는 것이 카프 문학을 비롯한 진보 문학이었고, 후자를 대표하는 것이 순수문학임은 잘 알려진 일이다. (p. 19)

 

  상상력은 문학에서 매우 중요하다. 체험 못지 않게 그 나름의 무게를 갖고 있는 것이 상상력의 기능인 까닭이다. 그것은 언어 속에 감춰진 의미를 발굴하게 해주고, 대상이 가진 의미의 폭을 넓혀주는 구실을 한다. 문학이 갖는 자장을 넓히는 데 있어, 그리고 그 외연과 내포를 확장시키는 데 있어서 상상력만큼 좋은 기제도 없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의 기능이 초월적인 영역에서 이루어진 상상력이라면, 체험이 갖는 장점을 희석시킬 위험성이 농후하다는 점이다. 이는 상상력이 언어의 차원에서 국한되지 않고, 사회의 영역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현재의 불온을 뛰어넘는 이상 사회에 대한 갈증이나 갈등을 뛰어넘는 것도 어쩌면 상상력의 영역에서 더 쉽게 그 해법을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인문학적 토양을 무척이나 갈급하고 있다. 이른바 인문학적 사고나 상상력이 계속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만큼 이 사회가 기계적이고 갈등 위주의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다는 방증이 아닐 수 없다. 기계론적 사고나 인과론적 사고만으로 어떤 갈등을 정합적으로 해결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까 인문학적 상상력을 통한 갈등 조정이 등장한 것이 아닐까.

  이런 맥락에서 보면, 체험과 상상력은 결코 다른 둘이 아니라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모두 사회적 현상이고 이를 매개로 인간의 행위와 문학 행위가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어느 하나의 요소를 앞세우고 이를 문학의 본질적 특색이라고 내세울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것들은 모두 사회라는 커다란 울타리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쌍생아일 뿐이다. 그러니 상상력에 기초한 것은 문학의 순수성이고 체험은 그 반대의 경우라고 굳이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p. 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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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상인』 2022-1월(3) <상상인 프롤로그> 에서

   * 송기한/ 문학평론가, 1991년『시와 시학』으로 평론 부문 등단, 저서『문학비평의 욕망과 절제』『1960년대 시인 연구』『한국 현대시와 시정신의 행방』『정지용과 그의 세계』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