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토끼와 느티나무 외 1편/ 김금용

검지 정숙자 2023. 8. 3. 01:08

 

    토끼와 느티나무 외 1편

 

    김금용

 

 

  원주 법천사지 너른 뜨락을 덮은 개망초꽃 들판에

  천년은 됨직한 느티나무 한 그루

  고려 때 세웠다는 빈 절터를 홀로 지키네

  허리도 굽고 무릎도 닳아 몸통에 큰 구멍이 났네

  영락없이 긴 귀 쫑긋 세우고 앉았던 토끼 모습이네

  적적한 느티나무의 동무가 되어줬던지

  은하수만 한가득 펼쳐진 절터에 남아

  열반에 든 부처를 귀 세우고 기다린 것인지

  남한강 달래강이 만나 합친 부론강에 노을이 퍼지면

  느티나무를 드나들던 토끼 한 마리

  빛 사래 치는 노을과 접신했던 모습이 보이네

 

  사공을 만나 부타가 된 싯다르타 뒤를 쫓지 않고

  느티나무의 벗이 되어준 토끼

  손바닥으로 느티나무 줄기를 쓰다듬으면

  지금도 토끼와 나누는 목소리가 들리네

  은하수가 밤하늘에 펼쳐지면

  느티나무 둥지로 내려와 자고 가는 토끼가 보이네

     -전문(p. 78-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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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의 시간이 온다

 

 

  숨소리로 온다

  빛으로 온다

  색으로 온다

  푸른 그림자까지 길게 데리고 온다

 

  빈 몸으로 헐벗고 섰던 들판

  감자밭 긴 고랑마다 빛이 고인다

  밟을 적마다 붉은 흙물이 올라온다

 

  태아가 용트림을 시작하는지

  까만 봉지를 찢고 기지개를 켠다

 

  아크릴 물감을 꺼낸다

  연겨자색 붓을 들어

  촉촉한 복숭아빛 향내를 그린다

 

  대청마루 밑 감자알을 꺼내온다

  호미와 곡괭이를 굽은 밭고랑에 내건다

  바람이 선수를 치며 들썩거린다

 

  오늘은 빛이 길다

  물의 시간이 오는 것이다

    -전문(p. 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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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물의 시간이 온다』에서/ 2023. 7. 15. <현대시학사> 펴냄  

  * 김금용1997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각을 끌어안다』『핏줄은 따스하다, 아프다』넘치는 그늘』『광화문 쟈콥』외, 한·중 번역시집『문화혁명이 낳은 중국현대시』『나의 시에게』『오늘 그리고 내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