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와 느티나무 외 1편/ 김금용
토끼와 느티나무 외 1편
김금용
원주 법천사지 너른 뜨락을 덮은 개망초꽃 들판에
천년은 됨직한 느티나무 한 그루
고려 때 세웠다는 빈 절터를 홀로 지키네
허리도 굽고 무릎도 닳아 몸통에 큰 구멍이 났네
영락없이 긴 귀 쫑긋 세우고 앉았던 토끼 모습이네
적적한 느티나무의 동무가 되어줬던지
은하수만 한가득 펼쳐진 절터에 남아
열반에 든 부처를 귀 세우고 기다린 것인지
남한강 달래강이 만나 합친 부론강에 노을이 퍼지면
느티나무를 드나들던 토끼 한 마리
빛 사래 치는 노을과 접신했던 모습이 보이네
사공을 만나 부타가 된 싯다르타 뒤를 쫓지 않고
느티나무의 벗이 되어준 토끼
손바닥으로 느티나무 줄기를 쓰다듬으면
지금도 토끼와 나누는 목소리가 들리네
은하수가 밤하늘에 펼쳐지면
느티나무 둥지로 내려와 자고 가는 토끼가 보이네
-전문(p. 78-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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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시간이 온다
숨소리로 온다
빛으로 온다
색으로 온다
푸른 그림자까지 길게 데리고 온다
빈 몸으로 헐벗고 섰던 들판
감자밭 긴 고랑마다 빛이 고인다
밟을 적마다 붉은 흙물이 올라온다
태아가 용트림을 시작하는지
까만 봉지를 찢고 기지개를 켠다
아크릴 물감을 꺼낸다
연겨자색 붓을 들어
촉촉한 복숭아빛 향내를 그린다
대청마루 밑 감자알을 꺼내온다
호미와 곡괭이를 굽은 밭고랑에 내건다
바람이 선수를 치며 들썩거린다
오늘은 빛이 길다
물의 시간이 오는 것이다
-전문(p. 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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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물의 시간이 온다』에서/ 2023. 7. 15. <현대시학사> 펴냄
* 김금용/ 1997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각을 끌어안다』『핏줄은 따스하다, 아프다』넘치는 그늘』『광화문 쟈콥』외, 한·중 번역시집『문화혁명이 낳은 중국현대시』『나의 시에게』『오늘 그리고 내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