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착하게 살지 않겠다고 기도할 때/ 강나루

검지 정숙자 2023. 7. 18. 01:36

 

    착하게 살지 않겠다고 기도할 때

 

     강나루

 

 

  설을 앞두고 우리 일가 모여

  생전의 할아버지가 쓰던 작은 탁자 위에

  낡고 글씨가 굵은 성경 한 권

  그 위에 모두 손을 얹고

  설날 상주였던 아버지가 기도를 하는 동안

  나는 마음속으로

  왜 착하게 사셨어요, 나는 착하게 살지 않을 거예요

  왜 이까짓 성경책만 읽었어요, 나는 성경을 읽지 않겠어요

  기도를 드렸다

  할아버지가 착하게 살며 성경을 읽는 동안

  세상은 착해지지도 않고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지고,

  학동 아파트 철거 붕괴사고가 터지고,

  화정동 아파트가 무너지고, 사람들이 죽어갔다

  내가 거짓으로 살아가도, 성경을 읽지 않아도

  여전히 사람들은 죽어가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세상

  내일모레는 민족의 대명절이라며

  가난하고 착한 사람들은 남광주시장에 북적거리는데

  오늘 밤, 할아버지의 낡은 성경 위에 손을 얹고

  착하게 살지 않겠다고 기도하는 동안

  아버지는,

  열다섯 살 때 만주 벽돌공장을 돌아

  6·25한국전쟁의 한복판을 지나

  겨우 성경 한 권을 남긴

  남루한 할아버지의 일생을

  눈 지그시 감고 기도한다.

    -전문-

 

  해설> 한 문장: 이 작품에는 할아버지의 삶이 전면에 나와 있지만 할아버지와 아버지, 나로 이어지는 대가적大家的 삶에 대한 가치 인식이 전제되어 있다. "겨우 성경 한 권을 남긴/ 남루한 할아버지의 일생"을 바라보는 자조적 시선 이면에는, 실상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소중한 답의 항목들이 새겨져 있다. 험난했던 한국현대사의 한복판을 지나오면서도 평생을 착하게 살며 성경을 의지했던 할아버지와 설날 상주로 기도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 화자는 우리가 진정 가치 있는 것으로 간직해야 할 응분의 그 무엇에 대한 숭고미적 인식에까지 이른다, 착함, 선함에 대한 본질의 지속을 우회적으로 각오한다.

  시인은 지금 우리의 삶에 틈입되어 있는 부조리에 대해 분노한다. "세상은 착해지지도 않고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지고" "아파트가 무너지고, 사람들이 죽어"가는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그러나 이것은 착함과 선함의 가치는 상실된 현실의 배리背理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한편 현실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곧 굳건한 자기 삶의 갱신에 대한 의지임을 역설한다. 이 역설의 지점이 바로 강나루의 시인의 서정이 존재하는 시적 근거지이다.

 

                 *

  그는 고유의 강한 내성의 목소리로, 깊은 여운과 자장을 가지고, 서정시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펼친다. 그의 시선에는 대상에 대한 깊은 사랑과 연민이 담겨 있으며 자기 삶에 대한 반성이라는 시인 특유의 사유 방식도 녹아 있다. 부드러움과 강직함, 아름다운 서정과 굳건한 의지의 대립적 가치를 통합하는 균형 감각은, 젊은 시인 강나루에게 우리가 기대를 거는 가장 강력한 근거이다. 서정적 사색의 깊이와 그것을 통해 발견하는 삶의 예지, 시가 삶의 따뜻한 위안이 되기를 바라는 독자가 않으면 많을수록 강나루 시인의 눈은 더욱 맑아지고 마음은 더욱 깊어질 것이다. (p. 시 56-57/ 론 119  * 127) (김병호/ 시인, 협성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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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감자가 눈을 뜰 때』에서/ 2022. 8. 30. <시와사람> 펴냄  

  * 강나루/ 1989년 서울 출생, 2020년『아동문학세상』으로 동시 부문 & 2020년『에세이스트』로 수필 부문 & 2020년 『시와사람』으로 시 부문 등단, 에세이집『낮은 대문이 내게 건네는 말』, 동시집『백화점에 여우가 나타났어요』, 연구서『휴머니즘과 자연의 수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