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대 외 1편/ 문효치
광대 외 1편
문효치
달빛 중에서도
산이나 들에 내리지 않고
빨랫줄에 내린 것은 광대다
줄이 능청거릴 때마다 몸을 휘청거리며
달에서 가지고 온 미친 기운으로 번쩍이며
보는 이의 가슴을 졸이게 한다
달빛이라도
어떤 것은 오동잎에 내려 멋을 부리고
어떤 것은 기와지붕에 내려 편안하다
또 어떤 것은 바다에 내려 이내 부서져 버리기도 한다
내가 달빛이라면
나는 어디에 내려 무엇을 하는 것일까
지금까지 사는 일에 아슬아슬한 대목이 많았고
식구들을 가슴 졸이게 한 걸로 보면
나는 줄을 타는 광대임에 틀림없다
-전문(p.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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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 대한 명상
- 여름
자귀꽃 속에 넣어 두었던
별빛 한 봉지 털어 내린다
소년 시절
그림엽서에 웃음처럼 그려 넣어 두었던
그 별빛
자귀꽃 속에서 익어
삶의 곱이곱이를 넘어
어느 날 문득
노년의 둥근 문이 보일 때
자귀꽃 속에서 익다가
저절로 터지는
그 별빛 한 봉지
이제는 바람의 몸에서 이는 경련처럼
아련한 아픔으로
터져 내린다
-전문(p.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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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선집 『길에 대한 명상』에서/ 2023. 3. 15. <시선사> 펴냄
* 문효치/ 1943년 전북 군산 출생, 1966년 ⟪한국일보⟫ &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집『연기 속에 서서』『무령왕의 나무새』『백제의 달은 강물에 내려 출렁거리고』『백제 가는 길』『바다의 문』『선유도를 바라보며』『남내리 엽서』『왕인의 수염』 『칠지도』『별박이자나방』『모데미풀』『계백의 칼』『어이할까』『바위 가라사대』등 15권, 시조집『나도바람꽃』, 시선집『동백꽃 속으로 보이네』『백제시집』『사랑이여 어디든 가서』『저기 고향이 보이네』『각시붓꽃』『낙타의 초상』등, 기타 저서『김현승 연구』『시가 있는 길』『시인의 기행시첩』『꿈을 쫓는 로맨티스트』(편저) 등 3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