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무령왕(武寧王)의 청동식이(靑銅飾履) & 시인의 산문/ 문효치

검지 정숙자 2023. 7. 6. 03:04

 

    무령왕武寧王의 청동식이靑銅飾履

 

    문효치

 

 

  하늘이 주신 목숨을 다 살으시고, 하나도 뺴지 않고 구석구석 다 살으시고, 곱슬거리는 백발白髮을 날리며, 달이라도 누렇게 솟고 파란 바람도 불고 하는 참 재미도 많은 날, 이윽고 옷 갈아입으시고 왕후王后며 신하臣下들 다 놓아두고, 혼자 길을 떨치고 나서서, 꾸불꾸불한 막대기 하나 골라 짚고, 아, 참말, 미끄러운 저승길로 가실 때 이 신을 신으시다.

 

  돌밭, 가시밭, 진흙 뻘길을 허리춤 부여잡고 달음질도 하고 수염도 쓰다듬으며 점잖게 걷기도 하여 임금님을 저승까지 곱게 모신 후, 이제 또다시 여기에 돌아와 쇠못이 박힌 불꽃 무늬의 신이여, 누구를 다시 모셔 가려 함이냐. 하늘이 정한 목숨을 구석구석 다 살으시고, 그리고 웃으며 떠날 누구를 모셔가려 함이냐. 

   -전문(p. 89-90)

 

  평> 「무령왕武寧王의 청동식이靑銅飾履」는 어느 의미에선 미당未堂의 신라관新羅觀에 맞설 수도 있는 향기론 백제수百濟愁의 백미편白眉篇. 무리 없는 언어의 균제미, 녹슨 신비의 연륜이 가까스로 손 끝에 묻어날 것만 같은 그 훈훈한 산조散調, 얄미울 정도로 빼어난 시인의 정신편력의 기준 등이 고루 조화되어 선연한 미감을 자아내고 있다. "하늘이 주신 목숨을 다 살으시고/ 하나도 뺴지 않고 구석구석 다 살으시고" 미끄러운 저승길로 가실 때 신으시던 왕의 신발에다 영성적(靈性的 향수(鄕愁의 눈길을 붓고, 최면 걸린 듯 한사코 이끌려만 가는 그 경지를 두고 현대성 유무와 기능면의 강조 따위 주문(注文은 부질없는 것이다. (p. 90) (권일송/ 시인)  

 

 

 시인의 산문/ 무령왕과 시> 전문: 어떤 이는 삶이란 경험 쌓기의 연속이라고 했다. 이때 경험이란 주체인 '나'가 주변의 모든 환경과 접촉하고 사색하고 관련을 맺으며 진행되는 일체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삶이란 사람을 만나는 일이 가장 중요한 것이며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그 삶의 질이나 성격이 달라질 것이다. 

  시도 마찬가지이다.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시인이 될 수도 안 될 수도, 시인이 되면 또 어떤 시를 쓰느냐도 내가 만나는 사람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나의 경우는 소년 시절 삼촌들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때 대학생이었던 삼촌들은 문학을 전공하지는 않았지만, 늘 시집 읽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또 술이라도 한잔 걸치면 벽에 기대앉아 구성지게 시를 읊곤 했다. 어린 나의 눈에도 그런 삼촌들의 모습은 매우 멋있어 보였고 그분들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시'라는 것에 많은 호기심과 가치를 부여했던 기억이 난다. '멋진 시를 쓰는 사람이 되리라.' 이런 생각도 했다.

  삼촌들은 한하운의 『보리피리』를 즐겨 읽었고 나도 난생 처음 시집이라는 것을 읽을 기회를 얻게 되었다. 어렸을 때였지만 어쩐지 슬프고 외롭다는 정서를 나는 그 책 속에서 느낄 수 있었다.

  초등학교 다닐 때 문현식 선생님의 글짓기에 대한 여러 번의 칭찬이 문학에 대한 의욕을 북돋워 주었고 중학교 때는 이병일 선생님이 수업 중에 시에 대한 가치를 높게 설명해 주었는데 이런 말들이 귀에 잘 들어왔다. 고등학교 시절 문예반 친구 박찬주를 만난 것도 내 문학에의 열정에 불을 지펴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나보다 두세 살 위의 동급생이었는데 당시 교내에서 가장 시를 잘 쓴다는 평을 들었다. 나는 그를 따라잡기 위해 불면의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대학 시절에 나는 미당선생님을 만남으로써 본격적인 습작에 매진할 수 있었으며 졸업할 무렵에는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의 절차도 밟게 되었다.

  내가 이런 분들을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아마도 시인이 아닌 다른 일을 하며 일생을 살았을 것이다.

  내 시의 근간을 이룬 '백제시'도 무령왕을 만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무령왕과 관련된 문화재 혹은 유물들을 만나고 접촉하게 된 것이 내 시 인생에 큰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무령왕은 1971년에 발굴되었다. 그때 매스컴에서는 이 사실을 대서특필했다. '해방 후 최대의 빌굴'이라고 사학계, 고고학계는 물론 온 나라가 떠들며 흥분했다. 나도 덩달아 흥분했고 그해 10월에 서울에서 발굴 유물 첫 전시회가 있었고 나는 곧장 전시장을 찾게 되었다. 그리고 그 유물들을 보면서 큰 충격을 받게 되었다. 특히 왕과 왕비의 시신을 모셨던 목관이 상당히 생생한 모습으로 내 눈앞에 있음을 보고 '아, 이것은 이승과 저승을 왕래하는 한 척의 배로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동안 무령왕뿐만 아니라 어쩌면 수많은 사람을 저승으로 데려가곤 하다가 이제는 나를 데려가려 여기에 왔다는 상상을 하게 되었다. 나는 그때 건강을 잃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살 때였다.

  목관을 배 이미지로 하여 시를 써보기도 하고 「청동식이」를 시로 써보기도 했다. 청동식이는 죽은 자가 저승갈 때 신는 신발이었다. (p. 87-89)    

 

   

 권일송 선배는 분에 넘치는 평을 이 시(「무령왕武寧王의 청동식이靑銅飾履」)에 붙여 주었다. 나는 이 글을 접하고는 큰 용기를 얻게 되었다. 이렇게 하면 시가 되는가 싶었다. 비교적 내 내면의 의식세계가 잘 드러났다고 생각했다. 이후 무령오아 관련 시들을 지속적으로 쓰게 되었다. 죽음과 삶의 문제,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삶의 의미와 죽음의 두려움, 그리고 사후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나 의문 등에 관한 사색들이 하나하나 시로 잡혀 나왔다. (p. 90~ )

  무령왕 자신의 생애와 경험들이 이런 상황과 관련한 문제성이 많은 사람이었다. 무령왕의 탄생과 그 전후의 백제 왕가의 환경 및 조건을 대강만 살펴보아도 무령왕이 왕위에 오르기까지 백제 왕가는 모반, 살해 등의 난마 같은 사건들에 휘말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1대 개로왕은 고구려 간첩 도림道琳에 속아 정사를 그르치고 국고를 탕진하여 장수왕의 침략을 초래하고 급기야 피살되었다. 이때 백제를 배신하고 고구려로 넘어간 재증걸루再曾傑婁와 고이만년古爾萬年에게 붙잡혀 절할 때 얼굴에 침을 세 번 뱉고 아차성으로 끌고 가 죽였다. 이때 무령왕은 13세였다.

  22대 문주왕은 부왕의 전사로 웅진으로 천도하는 비극을 감당했으나 무신武臣 해구解仇에게 살해되었다. 재위 13년째의 일이었다. 이때 무령왕은 16세였다.

  23대 삼근왕은 13세에 즉위하여 해구를 격살하고 모반자들의 가족들을 웅진 거리에서 참형했다. 그러나 15세에 요절하고 말았다. 권력투쟁의 희생물이라는 의문을 씻을 수 없는 정황이었다. 무령왕 18세의 일이었다.

  24대 동성왕도 순탄치 않았다. 해구를 격살한 진로眞老를 중용했으나 임류각을 짓고 사치와 방종을 일삼다가 신하 백가苩加에게 피살되었다. 무령왕 40세 때의 일이다.

  그 뒤를 이어서 왕위에 오른 이가 무령왕이다. 이처럼 무령왕은 소년 시절부터 전쟁, 청도의 국가적 실정, 모반, 살해 등의 처절한 경험을 겪으며 성장하면서 그의 내면 의식과 인격 형성 또는 삶의 질량에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나는 6.25 전쟁과 아버지의 월북, 집안의 몰락 그리고 월북자의 아들로서 소외와 불이익을 감수하며 지내던 세월 속에서 병을 얻게까지 되었다. 학군단 교육을 받고도 장교 임관에서 탈락하고 전방에서 동기생들이 소대장으로 있는 보병중대에서 하사관으로 굴욕적인 군대생활을 해야 했다. 군 수사기관의 감시 · 감찰 속에서 언행은 늘 조심해야 했고 제대 후에도 군 수사기관과 경찰의 조사 감시는 여전했다. 직장까지도 연결시켜 압박을 느꼈다. 때로는 억분함에 치를 떨고 때로는 절망감에 자지러지기도 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쓰러지고 말았다. 불면증, 소화불량, 부정맥 등으로 내 몸은 쇠약해져 체중이 34㎏으로 내려가고 정신은 황폐화 되어갔다. 늘 죽음에 대한 공포에 시달려야 했다. 용하다는 병원과 한의원을 찾아 다녔으나 허사였다. 삶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이 무렵에 무령왕을 만나게 된 것이다. 무령왕과 나는 물론 성장 과정이나 환경이 다르긴 했으나 죽음의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고 사색한 점은 어느 부분 상통한다고 생각했다.

  무령왕과의 만남(물론 정신적 만남)은 내 억압심리의 해소를 위한 탈출구였으며 삶의 위안이었고 동병상련의 인간적 애정을 느끼게 하는 교통로였다.

  나는 무령왕의 나라에 수시로 드나들었다. 그 나라는 장엄한 유계幽界의 나라였다. 한 번 교통을 튼 그 나라를 나는 점차 현세로 불러들이기도 하고 또 현세를 그 유계의 세계로 데리고 가기도 하면서 죽음도 삶의 한 부분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신비로운 세계가 열렸다. 그렇게 내 감각이 살아나며 일상적 눈으로는 발견할 수 없는 참신한 가치들을 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세계는 마치 수많은 보물을 숨겨놓은 보물창고 같기도 하고 무한의 금을 캘 수 있는 광맥 같기도 했다.

  무령왕의 '두침'은 한 채의 현악기였고, '뒤꽂이'는 이승과 저승을 막힘없이 날아다니는 새였으며 '은팔찌'는 한 사내의 왕비에 대한 사랑의 증표였다. 비어 있던 '청동잔'에 새로운 의미의 바람이 담겨 있었다.

  나는 이러한 부분을 캐기 위해 공주를 수없이 왕래했다. 그러다가 그 영역을 조금씩 넓혀갔다. 지리적으로 부여, 익산, 화순, 그리고 일본의 큐슈, 나라, 오사카 등을 탐색하러 다니게 되었다. 그러면서 나는 나름대로 백제의 세계를 정리해 보았다.

  첫째 나는 백제사의 여백에서 마음껏 상상의 세계를 펼치며 뛰놀면서 새로운 세계를 만들려고 했다. 백제의 정사正史는 여백이 많다. 후세 사가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기록을 누락시키거나 왜소화시킨 점이 많다. 또 유적이나 유물도 남아 있는 것이 많지 않다. 이 여백은 시인의 상상력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이다. 나는 문학적 접근을 통해 이 공간을 메꿔나가는 재미를 누릴 수 있었다.

  두 번째는 죽음의 공포를 해결하는 한 방법으로서 백제에 접근했다. 천오백 년 전의 사람, 유물, 문화, 의식 등과 소통하면서 그것들이 지금도 죽었거나 소멸한 것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었다. 죽음은 삶의 연장이며 저승은 현세의 이웃 동네임을 알 수 있었다.

  세 번째는 전통 계승의 한 방법으로 활용하고자 했다. 우리의 문화는 낯선 방법과 새로운 세계를 개척해나가는 진보적 성향과 민족 혹은 문화권의 고유성을 현현하고자 하는 전통 계승의 성향을 동시에 갖고 있다. 백제인은 우리의 조상이고 백제인의 생활양식, 정서, 의식 등은 우리의 문화적 유전 인자다. 그것을 현대에 접목하는 일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네 번째는 가시권 밖에서 떠도는 슬픈 백제사의 진혼을 위해 내 상상력의 일부를 쓰려고 했다. 사가들에 의해 축소 인멸된 패전국 백제사는 부당한 힘에 억눌려 음지에서 살고 있는 우리 인생사의 또 다른 얼굴이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매몰된 백제문화의 유기체를 오늘에 현현시키고자 의도해 보았다.

  그러나 시란 인위적 의도만으로 쓸 수는 없다. 시의 씨가 싹트고 잎 피우고 가지 뻗고 열매 맺기 위해서는 시적 영감이 필요하다. 하늘이 주는 이 시적 영감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기도와 같은 경건한 사랑의 심안을 가져야 한다. 사랑 없이 보는 돌은 그냥 돌이지만 사랑의 눈으로 보면 생명과 가치가 탄생한다. 백제유물은 무정한 물체가 아니라 신비로운 생명체다. 공주로 부여로 익산으로 방이동 석천동으로 때로는 큐슈, 나라, 오사카로 가서 그들을 껴안고 어루만지는 것은 영감을 얻기 위한 나의 기도인 것이다. (p. 95=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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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선집 『길에 대한 명상』에서/ 2023. 3. 15. <시선사> 펴냄

  * 문효치/ 1943년 전북 군산 출생, 1966년 ⟪한국일보⟫ &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집『연기 속에 서서』『무령왕의 나무새』『백제의 달은 강물에 내려 출렁거리고』『백제 가는 길』『바다의 문』『선유도를 바라보며』『남내리 엽서』『왕인의 수염』 『칠지도』『별박이자나방』『모데미풀』『계백의 칼』『어이할까』『바위 가라사대』등 15권, 시조집『나도바람꽃』, 시선집『동백꽃 속으로 보이네』『백제시집』『사랑이여 어디든 가서』『저기 고향이 보이네』『각시붓꽃』『낙타의 초상』등, 기타 저서『김현승 연구』『시가 있는 길』『시인의 기행시첩』『꿈을 쫓는 로맨티스트』(편저) 등 3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