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령군처럼/ 주영중
점령군처럼
주영중
그는 오늘 아침 후투티로 현현했으며 산딸나무 하얀 꽃잎으로 피어났다
한동안 오지 않던 그가 점령군처럼 왔다
은밀한 햇빛 속에서 산란하던 먼지들처럼
무자비한 그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채 얼마든지 공간을 점유한다
왜 그런 자가 존재를 들켜 오래도록 어린 아기의 울음과 기이한 웃음과 모방의 언어를 흘리는 걸까
그윽한 도둑처럼 사라지거나
한 움큼의 물로 두 손을 빠져나가는
생활을 조금이라도 지우지 않는다면 결국 끔찍한 일이 일어날 거야
바람이 휘저은 구름 호수에 젖은 저물녘
거꾸로 오르는 엘리베이터 물에 빠진 아파트 물의 벌어진 목구멍 속으로 들어가던 그가 쏟아진 아가미로 낙낙한 숨을 쉬고 물로 된 밥과 물로 된 반찬 물로 된 칼날의 통증
눈에서 나온 물이 호수와 뒤섞이고 그리하여 그는 둥근 물의 평원과 알지 못할 물의 나라 물의 대지로 나를 인도했으며
물의 평등 물의 침범 물의 언어 물의 사랑 물의 행적을 보여 주었다
드디어는 물의 광란 물의 해일에 이끌리는 시간
피가 물처럼 설레고
그의 얼굴은 물살로 기억되기도 한다
달빛, 두려움의 냄새가 풍기어 왔다
안녕하세요,
우리는
어색한 악수를 나누고
무한의 공간을 응시한다
오염된 거라구
나쁜 공기에 떠다니는 얼굴
잠시,
무정형의 데스마스크
어느 날 물속으로 사라진 거미가 은빛 줄을 튕겨 쇳소리를 연주했고
나는 늘어진 시간을 잡아당겨야 했다
두 손에 탈장된 언어를 그러쥔 채 죽은 언어들이 빠져나가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전문-
해설> 한문장: 인용한 시의 마지막에서 시인은 "두 손에 탈장된 언어를 그러쥔 채 죽은 언어들이 빠져나가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고 말한다. 시인은 이미 파국의 예언 같은 것은 오늘날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죽은 언어들이 빠져나가는 것을 그저 지켜보는 시선은 예언을 통해 파국을 대비하기엔 너무 늦었다는 사실을 포함해 예언이란 당최 오늘날 독자들에게 전달되지 않을 것이란 사실 모두를 암시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파국이라니, 혹시 시인의 파국은 그동안 우리가 알던 파국과는 다른 종류의 파국인 것은 아닐까. 그렇다 하더라도 파국이라니, 그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그러나, 그럼에도 시인이 여전히 파국의 예언을 고집한다면, 여기에는 조금 복잡한 속내를 비롯해 시인의 탁월한 판단이 담겨 있는 것으로 가정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조금 긴 배경 설명이 요청되는바, 이는 시인이 서 있는 '지금 여기'가 아무래도 조금 복잡한 까닭이다. (p. 시 11-13/ 론 123) (양순모/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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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몽상가의 팝업스토어』에서/ 2023. 6. 10. <파란> 펴냄
* 주영중/ 1968년 서울 출생, 2007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결코 안녕인 세계』『생환하라, 음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