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선(忠北線)/ 유종호
충북선忠北線
유종호
충북선은 내 마음의
자연사 박물관
출발의 설레임은 언제나
종점의 허망으로 끝나고
달려와 사라지는 풍경에 끌리어
혼자만의 낮꿈을 즐겼지.
카이저 수염의 백작인가
인단仁丹 광고판이 보이면
유치하게 부자가 되고 싶었지
타개진 가마니로 몸을 감싸고
화물차에 실려 가는 장정들
반역의 꿈은 사납고 무서워
무시로 먼 산이나 바라보았지
정하井下, 오근장梧根場, 도안道安, 소이蘇伊
이국정서의 낯선 매혹에
팔랑개비 나그네로 살고 싶었으나
지갑이 얇아서 책장이나 뒤졌지
선불 맞은 맹수의 비명
증기 기관차의 기적 소리 아니 나고
들리느니 이제는
점잖은 디젤의 기적일 뿐이나
충북선은 여전히 3등 노선
내 고독의 자연사 박물관
잃어버린 시간의 잔설殘雪이 푸르구나
-전문(p. 38-39)
충북선을 내면서> 전문: 시집 『서산이 되고 청노새 되어』를 상자한 것은 일흔 살 되던 2004년의 일이다. 예순이 넘어서 쓴 것들을 모은 것으로 머리말에서 밝혔듯이 시와 모국어를 향해 건네는 소소한 애정의 헌사요 정신 노화에 대처하는 내 나름의 방식이었다. 시인 소리 듣고 싶은 생각은 그때도 없었고 지금도 없다. 그 후 문예지나 시 전문지에 시를 발표한 적은 없다.
다만 소속해 있는 예술원의 비영리 연간 기관지에는 시랍시고 써서 발표하였다. 피아니스트가 피아노에서 손을 떼면 안 되듯이 워드프로세서에서 손을 떼면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다. 짤막한 시 쓰기가 어휘 구사력의 쇠퇴를 방지하는 적절한 계기가 되리라는 희망적 관측의 정당성은 두고 보아야 할 문제이긴 하다. 시는 젊음의 문학이요 장르란 생각이 널리 퍼져 있다. 평균수명이 짧았던 시대에 생긴 통념인데 고령화 시대에는 그대로 적용될 수 없다는 생각이다. 길이가 짧기 때문에 신체적 소모가 적어 도리어 고령자의 문학으로 적정하지 않은가, 하고 합리화하게 되었다. 긴장과 응축을 통한 고도의 언어경제를 집행하는 시인 본연의 자세는 물론 젊음이 담당해야 한다.
하지만 본업이 아니기 때문에 별 부담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글쓰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내게는 큰 매력이다. 늘그막에 여기餘技이기 때문에 문학적 야심이나 모험심 없이 평소의 소회를 그대로 토로하는 편안함도 큰 매력이다. 나이 들면서 삶이란 죽음으로부터의 도망이요 둔주라는 실감을 갖게 되기 마련이다. 조그만 일에 몰두하는 것은 도망자의 공포를 조금은 희석시켜주리라. 그러한 기대에서 앞으로도 글쓰기란 어릴 적 버릇을 버리지 말아야 할 것 같다.
여기 수록된 작품은 2015년에서 2021년, 그러니까 80줄에 들어서 쓴 것임을 첨가한다. 고령자의 소년회귀를 관대하게 보아 주시길. (p. 맨 앞) (저자/문학평론가 · 서울대 영문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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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충북선忠北線』에서/ 2022. 6. 20. <서정시학> 펴냄
* 유종호/ 1935년 충북 충주 출생, 첫 책 『비순수의 언어』에서 최근의 『그 이름 안티고네』에 이르는 비평적 에세이 20여 권이 있음. <서울대 영문과와 뉴욕 주립대(버팔로) 대학원 수학, 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