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정_주름 접힌 세계, 그 속···(발췌)/ 신발에서 벗어나는 일 : 이진옥
신발에서 벗어나는 일
이진옥
울창하지만 텅 빈 밤
불빛에 이끌려 맨발로 나섰어요
어느새 난 흔들리는 파도에 몸을 맡기죠
내 말 좀 들어봐요 들어보라니까요
외면하는 섬과 섬 사이로 떨어진 말이 떠다니고
쏟아지는 빛의 비명이 몸을 찔러도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그림자 무성해요
평형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 동안 신발에 갇힌 발뒤꿈치의 비명이 굳어 화석이 되어가는 걸 외면했다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한다면 신파라고 화를 낼 테죠
알아요 섬과 섬 사이를 떠돌며 한 말은 아니죠
아무렴 어떤가요
난 이미 두려움 없이
비 오는 거리를 맨발로 더듬어도
불빛이 차갑게 발을 더듬어도
시린 내 발을 연민하지 않아요
하지만 물끄러미 바라보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어요
물끄러미 물끄러미
물끄러미가 어느새 새벽을 몰고 오네요
맨발의 새벽을
- 이진옥, 「신발에서 벗어나는 일」 (『예술가』, 2023 봄) 전문
▶ 주름 접힌 세계, 그 속에서 피어나는 생명의 시학(발췌) _김윤정/ 문학평론가
세계에 존재하는 생성의 힘의 에너지가 단지 신비로운 존재들에게만 내재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인간 역시 세계 내적 존재인 점에서, 그리고 그 속에서 끊임없이 생명력을 발휘하며 분투한다는 점에서 내재적 힘의 실체이자 그 안에 무한한 생의 주름(pli)을 내포하는 특이성의 지대라 할 만하다. 그러한 존재라면 결국 라이프니츠의 표현을 빌어 모나드, 즉 단독자라 일컬을 수 있다. 위 시에서 그려지고 있는 "맨발"의 전재, "신발에 갇"혀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온 영혼을 다해 몸부림치는 자아가 그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위 시는 자신을 가두는 굴레에서 벗어나 온전히 자유로운 자가 되기를 열망하는 자아의 내적 고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를 위해 위 시는 "울창하지만 텅 빈 밤" "불빛에 이끌려 맨발로 나"선 화자의 '특이한' 경험을 다루고 있다. 밤의 시간대를 가리켜 "울창하지만 텅 빈 밤"이라 표현한 데서 화자가 느꼈을 시간의 독특함을 짐작할 수 있거니와, 그것은 가득 차 있는 듯하지만 공허하고 소란스러운 듯하지만 고요한 순간을 암시하고 있다. 이러한 시간 체험에 이르러 화자는 알 수 없는 방황의 감정에 휩싸이며 온갖 헤매임의 궤적을 보이게 된다. 그것은 혼란스러우면서도 자아에 대한 각성을 내포하며 급기야 자아가 맞이할 진실과 자유의 순간으로 열리게 되는 경험이기도 하다. 위 시의 시적 자아에게 그러한 순간은 괴롭고 고통스럽지만 기대와 감격으로 채워지는 시간이다. 이 시간의 지대를 지나오면서 화자는 자신이 더이상 과거의 자신이 아닌 다른 모습의 새로운 자아로 거듭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p. 시 202-203/ 론 203~204)
----------------------
* 『예술가』 2023-여름(53)호 <계간시평> 에서
* 김윤정/ 2007년 『시현실』로 평론 부문 등단, 저서 『위상시학』 『21세기 한국시의 표정』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