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 한 페이지를 펼쳐놓고 외 1편/ 조극래
텃밭 한 페이지를 펼쳐놓고 외 1편
조극래
감나무에 비스듬히 등을 기댄 물푸레나무
저승꽃 삭은 냄새
새들도 비켜 앉을 것 같은
이게 무슨?
정강이를 툭 차보는 나에게
밭이랑 문장에 형용사를 솎아내던 어머니
그대로 두어라 쓰잘머리 없을 것 같은 잡풀도
뽑아내면 밭둑 무너진다
네 아버지 설산 바람 같았어도
서녘 하늘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버팀목 아니었냐
비바람이 얼마나 독한 이빨 감추고 있는지
알지 않냐?
곰삭아도
숱한 태풍, 눈보라에도 버틴 악바리다
저 감나무
한 술 햇살에도 홍시 주렁주렁 매달 수 있는 건
물푸레나무가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바라보니
이불 밑에 따뜻한 밥 한 공기 묻어놓고
꾸덕꾸덕 널어 말린 어머니 눈물
문설주에 얼룩져 있다
-전문(p. 6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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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빈둥거림이 수북하고
당신이 쏟아부은 폭설을 치우느라 혓바늘이 돋는다
그럴 수 있다
당신은 현재에 열중하고 나는 내일마저 탕진했으니
폭설을 벗겨 내도 겨울이다
당신이 짜낸 눈물 두 접시가 녹지 않는다
따뜻한 변명으로도 소용이 없던
왜 겨울 장미는 무덤 자리를 화병으로 선택했을까
쉽게 감정에 노출되는 혼잣말처럼
우리는 말문을 닫아걸고
각자의 신발로 현관문을 밀었지 호기롭게
누구에게나 버리지 못하는 산책이 있다
당신이 절여 둔 향기가 뒤꿈치를 밟는 것 같아
뒤돌아보면
바람이 몸살을 하는 것인지
나도 몰래 앓는 소리가 새는 것인지
시골 우체통이 전갈하는 자욱눈
오지 않는 기별은 걸음을 풀썩 주저앉히고
천변을 수런거리는 산다화 꽃잎
오늘은 빈둥거림이 수북하고
혼자 남겨진 고독이 비명을 지른다
중얼거림이 당신 흉내를 낸다
시든 장미를 버리려다 손가시가 돋는다
-전문(p. 4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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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오늘은 빈둥거림이 수북하고』에서/ 2023. 6. 15. <시산맥사> 펴냄
* 조극래/ 경남 통영 출생, 1999년 『문예사조』로 등단, 시집 『답신』, 창작집『초보시인을 위한 현대시 창작 이론과 실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