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설계(設計)/ 강영은
검지 정숙자
2023. 6. 16. 02:39
설계設計
강영은
나는 내가 빈집일 때가 좋습니다
침묵이 괴물처럼 들어앉아 어두운 방을 보여줄 때 고독한 영혼이 시간과 만나 기둥이 되는 집, 증거 없는 희망이 슬픔과 만나 서까래가 되는 집
우주의 법칙을 속삭이는 별빛과 그 별빛을 이해하는 창가와 그 창가에 찾아든 귀뚜라미처럼 우리는 하나의 우주 속에 들어있는 벌레라고 우는 집
희고 깨끗한 미농지를 바른 벽이 도면圖面에 있어 닥나무 껍질에 들러싸인 품질의 영혼처럼 영혼의 물질처럼 나는 당신 안에 있고 당신은 내 안에 있어 충만한 집
내가 알고 있는 숲은 결코 그런 집을 지은 적 없어 새장 같은 집을 그릴 때마다 영혼을 설계하는 목수처럼 종달새가 날아와 얼기설기 엮은 노래로 담장 쌓는 집
수백 년 묵은 팽나무가 지탱하는 담장에 걸터앉아 떠오르는 해와 지는 해를 바라보는 일, 그것이 빈집의 업業일지라도
욕망의 가구가 놓여 있지 않은 그런 빈집이 나였으면 좋겠습니다 가슴 다친 새가, 앉았다 가는 내 집이 멋지지 않아서 좋습니다
-전문(p. 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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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네르바』 2023-봄(89)호 <신작소시집> 에서
* 강영은/ 2000년『미네르바』로 등단, 시집『상냥한 시론詩論』외 6권, 시선집『눈잣나무에 부치는 詩』, PPE(poem, photo, essay)집『산수국 통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