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길고 · 후일담/ 조기조
인생은 길고
조기조
헌책방 들렀다 우연히
절판된 시집을 만났다
저자의 인생보다 짧은
생명의 시들이 담긴 시집이다
세 권 중 두 권이 절판이라
귀한 시집을 얻었다 싶어 살피는데
내 서명이 담긴 증정본이다
그 사람,
내 시집을 헌책방에 팔고
생의 고단함 조금이라도 덜어냈더라면
히포크라테스여 당신 말이 맞다
나는 내 시보다 더 오래 살며
언제 죽을지 모를 시를
쓰고 또 쓰고 있나니.
-전문(p. 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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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일담
마지막 인사를 나누려고 갔었다 대기실에 모인 사람들은 차례로 들어가 작별 인사를 하고 나왔어 침상에 누워 있는 너는 전선과 호스로 기계에 의지한 채 편안해 보였어 손을 잡고 이마를 쓰다듬으며 잘 가라 하고 짧게 인사했다만 너는 대답이 없었다 그러고 나서 몇 시간 뒤 유리창 바깥에서 너를 지켜보는데 의료진이 너의 몸과 연결된 기계의 붉은 버튼을 눌렀어 네 몸이 한차례 움찔하는가 싶었는데 단속적이던 기계음이 길게 이어졌다 네게 들릴까 봐 그런지 다들 조그맣게 울더라 나는 스마트폰을 꺼내 네가 떠난 시간이 표시된 화면을 캡쳐했다 그리고 궁금해 할 거 같아서 하는 얘긴데 누군지는 모르지만 일곱 명에게 네 장기를 나눠주었다더라······
그런데 거긴 좀 어떠냐?
-전문(p.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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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간 시 전문지 『사이펀』 2023-여름(29)호 <이 계절의 시>에서
* 조기조/ 1994년 제1회 <실천문학상> 수상으로 등단, 시집 『낡은 기계』『기름美人』『기술자가 등장하는 시간』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