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오래된 끝에서/ 우남정

검지 정숙자 2023. 6. 6. 02:24

 

    오래된 끝에서

 

     우남정

 

 

  흘러넘치듯 능소화가 담벼락에 매달려 있다

 

  열매는 꽃에 매달리고 꽃은 줄기에 매달리고 줄기는 뿌리에 매달린다 뿌리는 지구에 매달려 있고 지구는 우주에 매달려 있다 매달린 것을 잊고 매달려 있다

 

   산다는 것이 매달리는 것일까 저 여자의 가슴에 젖이 매달리고 등에 아이가 매달리고 팔에 장바구니가 매달리고 장바구니는 시장에 매달리고 저 여자는 집에 매달려 있다

 

  손가락은 카톡에 매달려 있고 수많은 당신에 매달려 있다 당신은 씨줄과 날줄, 그물에 매달려 있다

 

  '매달리다'라는 말에는 오래된 슬픔이 묻어난다 '매달리다'라는 말에는 핏방울이 맺혀있다 '매달리다'라는 말에는 굴욕의 기미가 있다 '매달리다'라는 말에는 '솟구치다'의 그림자가 매달려 있다 그 끝에 거꾸로 솟은 종유석이 자란다

 

  매달리는 것은 추락을 견디는 것 오래 바람을 견디는 것 길게 휘어지는 촉수를 말아 안고 잎사귀 뒤 나뭇가지 끝에서 잠을 청한다

    -전문, 『뱀파이어의 봄』 . 천년의 시작, 2022.

 

 

  김이듬 : 우남정 시인님의 이번 시집 제목은 무척 도발적이며 역설적으로 느껴집니다. 어떻게 이 제목을 결정하게 되셨는지요? 그리고 표제작의 낭독도 부탁드립니다.

  우남정 : 위의 시「오래된 끝에서」에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우리의 삶은 서로 매달려 존재하는 관계이며 끝없이 주고받는 애증의 관계입니다. 주고받지 않는 관계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순간은 아무런 계산도 설명도 없는 맹목적인 것을 모두 느껴보셨지요.

  '뱀파이어의 봄'은 영화 「렛미인」에서 영감을 얻어왔습니다. 영화는 12살 소년 오스칼과 뱀파이어 소녀 이엘리의 사랑을 그려냅니다. 추운 스웨덴의 눈 쌓인 겨울 학교에서 왕따 당한 오스칼과 이엘리는 사랑에 빠집니디. 오스칼은 나중에 이엘리가 뱀파이어인 줄 알지만, 그와 함께하기로 합니다. 뱀파이어는 결코 늙지 않습니다. 오스칼은 결국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피를 구하는 일에 일생을 보낼지도 모릅니다. 봄은 뱀파이어처럼 대지의, 숲의 피를 빨아들이며 꽃을 피웁니다. 늙지도 않고 매해 봄을 피워냅니다. 생명의 피를 빨아들이고 피어나는 봄, 꽃들, 어쩌면 우리는 서로의 피(삶, 생명)를 빨고 빨리며 사랑하며 슬프도록 아름다운 봄날을 맞는 것이 아닐까요.  『뱀파이어의 봄』은 오래된 관계 속에 매달린 존재들의 슬프고 아름다운 봄(사랑)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p. 시 144/ 론 146-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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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마詩魔』 2022-겨울(15)호 <책방이듬에서 읽는시집_사랑과 우정의 이중주>에서

  * 우남정/ 충남 서천 출생, 2008년『다시올문학』 신인상 수상, 2018년 ⟪세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구겨진 것은 공간을 품는다』『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저녁이 오고 있다』

  * 김이듬/ 경남 진주 출생, 2001년 계간 『포에지』로 등단, 시집『별 모양의 얼룩』『명랑하라 팜 파탈』『말할 수 없는 애인』 『베를린, 딜렘의 노래』『히스테리아』『표류하는 흑발』『마르지 않는 티셔츠를 입고』, 장편소설『블러드 시스터즈』, 산문집『모든 국적의 친구』『디어 슬로베니아』『안녕 나의 작은 테이블이여』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