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첫눈이라는 아해(兒孩)/ 권애숙

검지 정숙자 2023. 5. 29. 02:09

 

    첫눈이라는 아해兒孩 

 

    권애숙

 

 

  허공을 여는 소리 휘파람 느린 소리

 

  숨소리 절반 접어 주머니에 넣어두고

 

  첫눈은 이런 거라지 흩날리는 숨이라지

 

  어디를 건너왔나 중력 없는 발바닥들

 

  엉성한 눈발 속에 지번도 지워지고

 

  엎드려 식은 기다림 안부인 듯 아닌 듯

 

  첫눈에 '첫' 지우고 눈발에 '발' 지우고

 

  남은 눈들 담장 너머 오락가락 녹는 기척

 

  머물던 흔적도 없이 서성이다 사라진 너

 

  첫발은 첫눈처럼 눈발은 첫발처럼

 

  고요히 스며들어 설레는 이름 자리

 

  언제든 열람할 수 있다 첫사랑이란 이름으로

     -전문-

 

  해설> 한 문장:  첫눈과 첫사랑처럼 잠깐 왔다가 가벼렸기에 더 애틋한 존재가 있다. 기척도 없고 흔적도 없이 고요히 스며들어 설레기만 한 우리들의 '첫'. 아해兒孩는 미숙한 존재다. 모든 첫은 이처럼 어설프고 서툴고 두렵다. 그래서 더없이 소중하다. 처음이라는 것 자체가 사람에게 큰 각인 혹은 인상을 남기는 것이지만 트라우마가 되기도 한다. 처음 시도하고 도전하는 것은 앞으로의 자기 삶의 이정표를 만드는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삶의 이정표를 가름 잡아 주는 길잡이 역할이라는 점에서 '첫'은 중요하다. '첫'과 '아해'의 결합은 그 순수성을 공통분모로 품는다. 처음 겪는 것들은 어딘가 미숙하고 서툴러서 실수나 과오를 저지르는 일이 많아 오래 지속하기가 쉽지 않다.

  반면, 설렘과 기대를 품은 '첫'은 서툴지만 좋은 기억으로 각인될 수 있다. "머물던 흔적도 없이 서성이다 사라진 너"는 기억 속으로 "고요히 스며"들지만 "첫사랑이란 이름으로", "언제든 열람할 수 있다". 모든 존재에게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결코 잊힐 수 없는 생의 '첫' 경험이다. 매 순간 처음이기에 우리는 두렵고 낯설지만 오히려 그 정서로 인해 설렐 수도 있는 것이다. '첫눈이라는 아해"는 그런 점에서 권애숙 시가 출발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p. 시 32-33/ 론 104-105) (이송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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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조집 『첫눈이라는 아해兒孩에서/ 2023. 5. 15. <문학의전당> 펴냄

  * 권애숙/ 경북 선산 출생, 1994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조 부문 당선 & 1995년 『현대시』로 시 부문 등단,  시집『차가운 등뼈 하나로』『카툰세상』『맞장 뜨는 오후』『흔적극장』『당신 너머 모르는 이름들』, 산문집『고맙습니다 나의 수많은 당신』, 동시집『산타와 도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