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산굽이 돌아오다가 외 1편/ 김현지

검지 정숙자 2023. 5. 21. 02:52

 

    산굽이 돌아오다가 외 1편

 

    김현지

 

 

  함양계곡 옛 선비들

  다투어 지어놓은 정자들 둘러보다가

  시인 묵객들 거쳐 간 천하절경 두루 돌아보다가

  작으나마 내 마음속 정자에도

  현판 하나 달아야지 하고 마음 정했다

 

  몇 년째 나 혼자 지어놓고 맘속으로만 부르던

  쉴 휴, 산굽이 연, 휴연정休연亭, 어때?

  몇 번이고 내가 나에게 묻던

  뫼 山 변에 입 口와 달 月이 합성된 한자어.

 

  산기슭의 나에게

  이윽히 손 내밀고 말을 거는 저 달,

  옥편에만 있고

  상용한자에 없는 산굽이 '연'자를 굳이 고집한 건

  그냥 내 맘이다.

 

  검정 목판에 예서체 흰 글자

  돋을새김으로.

  붉은 낙관은 작고 또렷하게.

     -전문(p. 70-73)

 

  휴연정

 

  분에 넘치는 정자를 지어놓고

  둘만 즐기기엔 너무 아까운 쉼터로

  삼십년지기 글 친구들이 찾아왔다.

  10년 전 한 평 그늘이던 느티나무가

  열 평 넘게 자라 올라 녹색 그늘을 드리워주고

  장미가 만발한 울타리 너머로

  뻐꾸기 온 산을 울어대는 딱 맞춤한 계절에.

  나의 소중한 도반들, 와줘서 고마워!

    -전문(p.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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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우산翠雨山

 

 

   강 건너편의 서쪽 산은 볼수록 수려하다.

  지리산 천왕봉에서 굽이굽이 뻗어 내리다 우뚝

  봉우리 서넛 맺어놓고

  서서히 남으로 허리를 내려

  경호강에 발목을 담그는 산,

  저 산을 이제부터 '취우산'이라 부르기로 했다.

  행정지도상에는 본명이 따로 있다는데

  나는 그냥 취우산이란 예명을 붙여주고

  혼자 그렇게 부른다

  아침이면 강에서 피어오르는 물안개가

  산허리를 감싸는 풍경은 더없이 환상적이다.

 

  '취우翠雨'는

  방산 선생님이 지우주신 내 아호雅號다.

 

  "비췻빛 바람 부는 곳

  빗방울도 비취 되어 내리는 곳

  그 바람, 그 빗방울 모아들이는 취우당翠雨堂

  비췻빛 시수詩水

  비췻빛 시초蓍草가 자라는 

  그 연못

  그 무지개

  서리서리 감싸 안은 취우당翠雨堂"

 

  당나라 시인 왕유王維의 시편을 인용해

  써주신 '翠雨堂奇"의 전문이다.

 

  나는 이 아호가 너무 맘에 들어

  '취우당翠雨堂'이란 현판까지 마련했다.

  한학을 하는 후배가 옥빛으로  서각해서

  직접 달아주었는데 바라볼수록 잘 어울려서

  볼 때마다 고마움을 느낀다.

    -전문(p. 88-90)

 

   * 블로그 註: 사진은 책에서 일독 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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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우산에서 10년 그리고 1년에서/ 2023. 4. 15. <SUN> 펴냄

   * 김현지경남 창원 출생, 1988년 『월간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연어일기』『포아풀을 위하여』『풀섶에 서면 내가 더 잘 보인다』『은빛 눈새』『그늘 한 평』『꿈꾸는 흙』등, <유유> & <향가시회>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