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굽이 돌아오다가 외 1편/ 김현지
산굽이 돌아오다가 외 1편
김현지
함양계곡 옛 선비들
다투어 지어놓은 정자들 둘러보다가
시인 묵객들 거쳐 간 천하절경 두루 돌아보다가
작으나마 내 마음속 정자에도
현판 하나 달아야지 하고 마음 정했다
몇 년째 나 혼자 지어놓고 맘속으로만 부르던
쉴 휴休, 산굽이 연연, 휴연정休연亭, 어때?
몇 번이고 내가 나에게 묻던
뫼 山 변에 입 口와 달 月이 합성된 한자어.
산기슭의 나에게
이윽히 손 내밀고 말을 거는 저 달,
옥편에만 있고
상용한자에 없는 산굽이 '연'자를 굳이 고집한 건
그냥 내 맘이다.
검정 목판에 예서체 흰 글자
돋을새김으로.
붉은 낙관은 작고 또렷하게.
-전문(p. 70-73)
휴연정
분에 넘치는 정자를 지어놓고
둘만 즐기기엔 너무 아까운 쉼터로
삼십년지기 글 친구들이 찾아왔다.
10년 전 한 평 그늘이던 느티나무가
열 평 넘게 자라 올라 녹색 그늘을 드리워주고
장미가 만발한 울타리 너머로
뻐꾸기 온 산을 울어대는 딱 맞춤한 계절에.
나의 소중한 도반들, 와줘서 고마워!
-전문(p.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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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우산翠雨山
강 건너편의 서쪽 산은 볼수록 수려하다.
지리산 천왕봉에서 굽이굽이 뻗어 내리다 우뚝
봉우리 서넛 맺어놓고
서서히 남으로 허리를 내려
경호강에 발목을 담그는 산,
저 산을 이제부터 '취우산'이라 부르기로 했다.
행정지도상에는 본명이 따로 있다는데
나는 그냥 취우산이란 예명을 붙여주고
혼자 그렇게 부른다
아침이면 강에서 피어오르는 물안개가
산허리를 감싸는 풍경은 더없이 환상적이다.
'취우翠雨'는
방산 선생님이 지우주신 내 아호雅號다.
"비췻빛 바람 부는 곳
빗방울도 비취 되어 내리는 곳
그 바람, 그 빗방울 모아들이는 취우당翠雨堂
비췻빛 시수詩水
비췻빛 시초蓍草가 자라는
그 연못
그 무지개
서리서리 감싸 안은 취우당翠雨堂"
당나라 시인 왕유王維의 시편을 인용해
써주신 '翠雨堂奇"의 전문이다.
나는 이 아호가 너무 맘에 들어
'취우당翠雨堂'이란 현판까지 마련했다.
한학을 하는 후배가 옥빛으로 서각해서
직접 달아주었는데 바라볼수록 잘 어울려서
볼 때마다 고마움을 느낀다.
-전문(p. 88-90)
* 블로그 註: 사진은 책에서 일독 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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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우산에서 10년 그리고 1년』에서/ 2023. 4. 15. <SUN> 펴냄
* 김현지/ 경남 창원 출생, 1988년 『월간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연어일기』『포아풀을 위하여』『풀섶에 서면 내가 더 잘 보인다』『은빛 눈새』『그늘 한 평』『꿈꾸는 흙』등, <유유> & <향가시회>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