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한세상/ 황봉구

검지 정숙자 2023. 5. 7. 01:47

 

    한세상

 

    황봉구

 

 

  한세상 이야기를 하고, 노래를 부르고, 입안에 맛있는 음식을 씹으며, 백화가 만발하는 것을 지켜본다. 새들의 지저귐을 들으면서, 공기의 싱그러움을 움찔 느낀다. 늘 푸른 바다를 바라볼 때, 나는 살아 있다. 나라고 말할 수 있을 때, 진정으로 살아 있음이다.

 

  한세상 나는 이렇게 살다 갈 것이다. 바다는 늘 푸르다. 기다란 제방이 포구를 가로지르고 등대가 하나 더 생겼다. 내가 떠나더라도 바다는 늘 푸르겠지. 슬픔에 바람이 불며 파도라도 하얗게 부서질까. 그건 살아 있는 내가 머릿속에 윙윙거리며 집어넣은 상상일 뿐이다.

 

  한세상 아버지 어머니도 살다가 떠나셨다. 임종을 앞둔 고요한 얼굴의 아버지가 생각난다. 새벽녘에 일그러진 얼굴로 저 멀리 가신 어머니도 길고 긴 삶을 사셨다. 흐르는 세월의 강물에 그냥 나룻배 한 척 지나갔을 뿐. 그들은 모두 화장터에서 조그만 항아리를 채울 가루가 되었다. 가루는 땅에 묻혔지만 영혼이 있다면 두  분이 살아생전에 그렇게 기도를 드린 대로 하늘나라 천국에서 숨을 쉬고 계실 터.

 

  한세상 정신을 지닌 몸뚱이를 굴렸던 내가 가루가 된다. 그냥 한 그루 나무 밑에 묻힌다. 흙으로 바뀌어 나무줄기를 타고 수십억 나뭇잎 한 잎으로 매달릴 수 있을까. 현재의 나는 완전히 소멸된다. 물이 수증기가 되고 구름이 되어 빗방울로 다시 떨어지듯 나는 없어지되 생명의 힘과 움직임은 그림자처럼 지속된다. 정말 그럴까.

 

  한세상 끝나며 '내'가 사라질 때, 나는 그런 모습의 나를 바라볼 수 있을까. 아마도 잠이 드는 것처럼, 눈을 감고 어둠만을 느끼며 모든 것이 완벽하게 사라지는 것처럼 그렇게 떠나겠지. 잠이 들어 내가 나를 모르는 것처럼 그냥 잠이 들겠지. 그랬으면 좋겠다.

 

  한세상 매일 밤만 되면 잠을 잔다. 그중의 어느 날 잠이 나를 데려가겠지. 그랬으면 좋겠다.

     -전문(p. 111-112)

 

 詩「이야기」> 4 · 5연: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대는 나이 들어 홀로 되었다. 가는귀도 먹었고 눈은 어슴푸레하다. 몸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는다. 그래도 이야기는 언제나 친절하게 나를 반긴다. 이야기와 나는 우리가 된다. 우리는 지금껏 우여곡절을 많이 겪어 왔다. 그럴수록 이야기는 몸집이 불었다. 거대한 우주 산맥이 되었다. 깊은 협곡에는 강물도 흐른다. 이야기는 마냥 제멋대로 모습을 바꾸며 다가선다. 멍한 일상에서 이야기가 이야기해 주는 이야기들이 내 숨을 버티게 해 준다. 이야기가 나를 이끌어 가고 있다.

 

  이야기가 꽃을 피운다. 울긋불긋 총천연색이다. 꽃들이 화사하다. 봉오리가 터질 때는 아프기도 했다. 아픔이 거름이 되어 꽃잎은 크게 벌어지며 수많은 웃음을 얼굴에 띄웠다. 그 꽃들이 시들어 떨어질 때는 말이 전혀 없었다. 그래도 이야기는 굴러 떨어지면서도 흔적을 남긴다. 이야기꽃들은 그늘을 가슴에 담아 숨긴다. 오늘도 나는 그 이야기의 꽃 그림자를 꺼내 현재를 흘러가게 한다. 이야기의 그림자들이 눈앞에서 흐른다. 멈춤이 없다. 아마도 그 꽃 이야기는 나를 삼킬 것이다. 나를 담아서 꽃 그림자가 되어 때가 되면, 우연히 어떤 곳에 머무르게 되면 이야기로 얼굴을 드러내며 이야기를 할 것이다. 이야기는 언제나 이야기로 남는다. 이야기는 영원한 삶을 실현한다.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면 숨결이 느껴진다. 나는 오늘도  이야기 속으로 뻐져든다. 홀로. (p. 98-99)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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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어둠에 빛을 찾아서』에서/ 2023. 5. 1. <파란> 펴냄

  * 황봉구/ 1948년 경기 장단 출생, 시집『새끼 붕어가 죽은 어느 날』『생선 가게를 위한 두 개의 변주』『물어뜯을 수도 없는 숨소리』『넘나드는 사잇길에서』『허튼 노랫소리-散詩 모음집』, 예술철학서『생명의 정신과 예술-제1권 정신에 관하여』 『생명의 정신과 예술-제2권-생명에 관하여』 『생명의 정신과 예술-제3권-예술에 관하여』『사람은 모두 예술가다』, 예술 산문집 『태초에 음악이 있었다』 『소리의 늪』『그림의 숲』『소리가 노래로 춤을 추다』, 산문집『당신은 하늘에 소리를 지르고 싶다』『바람의 그림자』『부대끼는 멍청이의 에세이』『천천히 그리고 오래』, 여행기 『아름다운 중국을 찾아서』 『명나라 뒷골목 60일 간 헤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