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나무늘보의 비상구 외 1편/ 주경림

검지 정숙자 2023. 4. 28. 01:58

 

    나무늘보의 비상구 외 1편

 

    주경림

 

 

  숲속에서 나무늘보가 독수리를 만나면

  어떻게 피할까

 

  도망가 봤자 느려서 잡힐 것이 뻔한데

  나무늘보는 나뭇가지에 매달렸던 손을

  그냥 놓아 버린다

  저 밑으로 툭 떨어진다

 

  떨어지는 것이 가장 빨리 도망갈 수 있는 속도

  순간, 그렇게 목숨을 버린다

  목숨을 버려 자신을 구한다

 

  내 것에만 꺼둘려 꽉 잡고 있는 동안

  나무늘보는 느림을 통해

  어느새, 방하착放下着할 줄을 안다.

       -전문(p.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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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비추의 사랑편지

 

 

  천둥번개 치던 밤을 보내고야

  새침데기 비비추가 꽃봉오리를 살짝 연다

 

  낚싯바늘 같은 암술에 걸려 날개를 접은

  꽃등에,

  도톰한 몸으로 가녀린 꽃 속을 어찌 들어갈까

 

  비비추가 꽃주름을 폈다 오므렸다 하며 응원할 때

  꽃등에가 팔락팔락 보라치마 속을 들고 나다가

  가장 깊숙한 샘에 이른다

 

  꿀 한 모금 목을 축이는 사이,

  비비추는 꽃등에의 다리며 날개에

  꽃가루를 잔뜩 묻혀 준다

 

  "자, 이제 내 사랑 전해 줘요"

 

  꽃등에가 훌쩍 날아가자

  보라치마가 핑그르르 접히며 오므라진다

 

  비비추 옆에서 나도 허공에 사랑편지를 쓴다.

      -전문(p. 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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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선집 『비비추의 사랑편지』에서, 2023. 4. 20. <문예바다> 펴냄

  * 주경림서울 출생, 1992년『자유문학』으로 등단, 시집『씨줄과 날줄』『눈잣나무』『풀꽃우주』 『뻐꾸기창』『법구경에서 꽃을 따다』(e북), 시선집『무너짐 혹은 어울림』 / 유유 & 현대향가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