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늘보의 비상구 외 1편/ 주경림
나무늘보의 비상구 외 1편
주경림
숲속에서 나무늘보가 독수리를 만나면
어떻게 피할까
도망가 봤자 느려서 잡힐 것이 뻔한데
나무늘보는 나뭇가지에 매달렸던 손을
그냥 놓아 버린다
저 밑으로 툭 떨어진다
떨어지는 것이 가장 빨리 도망갈 수 있는 속도
순간, 그렇게 목숨을 버린다
목숨을 버려 자신을 구한다
내 것에만 꺼둘려 꽉 잡고 있는 동안
나무늘보는 느림을 통해
어느새, 방하착放下着할 줄을 안다.
-전문(p.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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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비추의 사랑편지
천둥번개 치던 밤을 보내고야
새침데기 비비추가 꽃봉오리를 살짝 연다
낚싯바늘 같은 암술에 걸려 날개를 접은
꽃등에,
도톰한 몸으로 가녀린 꽃 속을 어찌 들어갈까
비비추가 꽃주름을 폈다 오므렸다 하며 응원할 때
꽃등에가 팔락팔락 보라치마 속을 들고 나다가
가장 깊숙한 샘에 이른다
꿀 한 모금 목을 축이는 사이,
비비추는 꽃등에의 다리며 날개에
꽃가루를 잔뜩 묻혀 준다
"자, 이제 내 사랑 전해 줘요"
꽃등에가 훌쩍 날아가자
보라치마가 핑그르르 접히며 오므라진다
비비추 옆에서 나도 허공에 사랑편지를 쓴다.
-전문(p. 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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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선집 『비비추의 사랑편지』에서, 2023. 4. 20. <문예바다> 펴냄
* 주경림/ 서울 출생, 1992년『자유문학』으로 등단, 시집『씨줄과 날줄』『눈잣나무』『풀꽃우주』 『뻐꾸기창』『법구경에서 꽃을 따다』(e북), 시선집『무너짐 혹은 어울림』 / 유유 & 현대향가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