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매를 걷어 올리는 나한/ 주경림
소매를 걷어 올리는 나한
주경림
무얼 하시려나?
나한이 소매를 걷어 올렸다
장삼 소매 속에서 단전에 모았던
양손을 꺼내
오른손으로 왼쪽 치렁한 소맷자락을 걷어 올렸다
내가 밥 짓고, 설거지하듯
흙먼지 쓸어 내는 청소라도 하시려나
학의 날개 같은 장삼자락 걷고
입전수수立廛垂手 우리들 속에 끼어들었다.
-전문-
서정抒情을 향하다/ 도플갱어, 내 모습과 애틋한 사랑 이야기> 한 문장: '입전수수'는 불교에서 인간의 본성을 찾아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목동이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한 「심우도㝷牛圖」 중에 마지막 단계이다. 중생 제도를 위해 함께 일하고 고통도 함께 나누려고 우리 속으로 들어오신 나한이기에 무척 반가웠다. 소매를 걷어 올린 손을 덥석 잡아보고 싶었다.
인간으로서는 수행의 가장 높은 단계에 오른 나한이라도 항상 열락悅樂의 미소 짓는 표정만을 보여 주지는 않는다. 성속聖俗을 넘나들며 우리처럼 기뻐하고 슬퍼하고 즐거워하고 화를 내기도 한다. 꺼멓게 벌린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오고 돌 눈물방울이 울퉁불퉁한 뺨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리는 슬픔에 젖은 나한상의 모습에서 진정한 위로를 받았다. 최고의 깨달음을 얻어 '공양을 받을 만한 분'도 이리 슬퍼하니 오늘만큼은 나도 애써 감추려 하지 않고 퍼내고 퍼내도 바닥나지 않는 슬픔을 온전히 누려 보아도 좋을 듯했다. 나한상이 울고 성난 표정을 지어도 그 모습은 밉지 않고 환해 보인다. 고려시대 때 거친 화강암을 떡 반죽처럼 주물러 오백나한의 자유자재한 표정을 빚어낸 석수 장인의 신기神奇에 매료되어 변화무쌍한 표정을 가진 여럿의 나한을 만났다. (p. 시 45/ 론 108-109)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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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선집 『비비추의 사랑편지』에서, 2023. 4. 20. <문예바다> 펴냄
* 주경림/ 서울 출생, 1992년『자유문학』으로 등단, 시집『씨줄과 날줄』『눈잣나무』『풀꽃우주』 『뻐꾸기창』『법구경에서 꽃을 따다』(e북), 시선집『무너짐 혹은 어울림』 / 유유 & 현대향가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