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이미 예상하는 일/ 이서화

검지 정숙자 2023. 4. 25. 02:41

<창간 20년간 소수정예 신인을 배출한 『시로여는세상』 사람들의 특집> 中

 

    이미 예상하는 일

 

    이서화

 

 

  다 자란 무는

  슬쩍 잡아당기면 쑥 빠진다

  이미 예상하였다는 듯

  모처럼의 파란 하늘이 묻었다는 듯

  무의 아래쪽은 달밤인 듯 희다

 

  누가 시켜서 피는 꽃은 없지만

  늦가을 내리는 비, 비행을 준비하는 홀씨들은

  다 예상하는 일들이다

  우리는 그 예상을 시간으로 쓰고

  좋았거나 쓰라렸던 시절로 돌아본다

  후회를 덜어내고 회상을 소비한다

 

  알 수 없는 앞날을 살아간다지만

  모두가 예상하는 그 일을 향해

  저마다의 예상까지 살아가는 일이다

  본래 있었던 것들과

  큰 풍파도 없이 곱게 늙은 사람일지라도

  이미 다 알고있어 꽃피고 홀씨를 날리는 일을 따라

  한해살이들을 보며 위안하는 일

 

  어떤 예상 앞에서도 차분한

  노인의 등에 없힌 손주는 아직 겪은 일이 없어서

  예상하는 일들도 없다

 

  분간도 모르는 한때와

  분간에 선 한때가

  자장가 속에서 서성인다

    -전문(P. 190-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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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로여는세상』 2021-겨울(80)호 <특집 2/ 시로여는세상 창간 20년 > 에서

 * 이서화/ 2008년『시로여는세상』으로 등단, 시집 『굴절을 읽다』 『낮달이 허락도 없이』『날씨 하나를 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