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주머니에 파이프 오르간 소리를 넣어 두었다/ 권현형

검지 정숙자 2023. 4. 22. 01:05

 

    주머니에 파이프 오르간 소리를 넣어 두었다

 

    권현형

 

 

  언제였더라, 어제의 일이 가까스로 떠오를 때

  주머니에 간직하고 있던 파이프 오르간 소리가 흘러나왔다

 

  부서진 상자를 오래 안고 서 있게 될 줄 몰랐다

  가까이 지낸 적 없는 사람이

  멀리 가버렸다는 소식을 들은 후

  귀를 내려놓지 못하고 오래 서 있다

 

  살아 있는 나무와 유령 사이에서

  내 그림자와 함께 느리게 걷는다

  낮달이 오후  3시의 하늘에 투명 스티커처럼 붙어 있다

 

  단정하고도 다정한 사람이 반달 모양으로 썬 무를

  붙여 놓았을 거야, 짐작해보며 아득해진다

  김소월의 '고아'를 기억한다는 그를 나도 기억한다

 

  누군가 바짝 쫓아오며 헛기침 소리를 냈다

  한 뼘 뒤, 바로 한 뼘 뒤에서 폭설이 내리고

  노랑나비가 날아다니고 삼나무가 울고 있었다

 

  내 그림자가 잘 쫓아오는지 다시 뒤돌아본다

  헛기침 같은 것, 햇볕의 잔상 같은 것

  소나기의 랩 같은 것, 그런 순간이 동시에 일렁거린다

    -전문(p. 75-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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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로여는세상』 2021-겨울(80)호 <신작> 에서

  * 권현형/ 1995년『시와시학』으로 등단, 시집『밥이나 먹자, 꽃』『포옹의 방식』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