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시화/ 유정
세시화
유정
봄이 지는 오후, 하나 둘 꽃잎이 발등을 적실 때
아무도 눈길 주지 않는 울타리 밖에서
초록 하나가 저 혼자 세를 불리며 사랑을 키우고 있었다
키운다는 건 기다리는 일, 하염없이 시간을 어루만지는 일
손길 닿는 곳마다 숨겨 둔 날개가 음표로 돋아나는 여름이
매미소리처럼 차르르 한꺼번에 쏟아지자 잎사귀들이 일제히
바닥을 치며 일어섰다 어둠을 지나는 사이사이 바람을 가르고
햇살의 어깨가 기울어질 때쯤 한 눈금씩 자라던 사랑이 눈을 뜨고 있었다
당신이 온다던 오후 세 시, 그 약속의 시간에 장막을 걷고
장맛비조차 꼿꼿이 견디며 키워 온 기다림의 꽃잎이 연주를 시작한다
작고 여린 잎 술이 하나씩 펴지면 분홍빛 연주가 클라이막스가 되는 시간
다섯 시, 당신이 오든 오지 않든 허공을 향해 흔드는 노래는 절정이다
하루치의 그리움이 문을 닫는 저녁, 음표들이 하나씩 떨어지고
물결치던 안개꽃 연주가 하나 둘 고요 속으로 침잠한다
그래, 사랑은 늘 멀고 깊고 오래도록 기다리는 일이지
내일도 모레도 당신이 올 때까지
-전문(p. 88-89)
* 세시화: 3시에 봉오리가 벙글기 시작해 5시에 활짝 여는 꽃잎이 아주 작은 일명 '잎 안개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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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마詩魔』 2022-가을(13)호 <시마詩魔 1>에서
* 유정(본명,박경옥)/ 2008년 『문파』로 등단, 수필집 『발자국마다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