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세시화/ 유정

검지 정숙자 2023. 4. 21. 00:42

 

    세시화

 

    유정

 

 

  봄이 지는 오후, 하나 둘 꽃잎이 발등을 적실 때

  아무도 눈길 주지 않는 울타리 밖에서

  초록 하나가 저 혼자 세를 불리며 사랑을 키우고 있었다

 

  키운다는 건 기다리는 일, 하염없이 시간을 어루만지는 일

 

  손길 닿는 곳마다 숨겨 둔 날개가 음표로 돋아나는 여름이

  매미소리처럼 차르르 한꺼번에 쏟아지자 잎사귀들이 일제히

  바닥을 치며 일어섰다 어둠을 지나는 사이사이 바람을 가르고

  햇살의 어깨가 기울어질 때쯤 한 눈금씩 자라던 사랑이 눈을 뜨고 있었다

 

  당신이 온다던 오후 세 시, 그 약속의 시간에 장막을 걷고

  장맛비조차 꼿꼿이 견디며 키워 온 기다림의 꽃잎이 연주를 시작한다

  작고 여린 잎 술이 하나씩 펴지면 분홍빛 연주가 클라이막스가 되는 시간

  다섯 시, 당신이 오든 오지 않든 허공을 향해 흔드는 노래는 절정이다

 

  하루치의 그리움이 문을 닫는 저녁, 음표들이 하나씩 떨어지고

  물결치던 안개꽃 연주가 하나 둘 고요 속으로 침잠한다

 

  그래, 사랑은 늘 멀고 깊고 오래도록 기다리는 일이지

  내일도 모레도 당신이 올 때까지

     -전문(p. 88-89)

 

   * 세시화: 3시에 봉오리가 벙글기 시작해 5시에 활짝 여는 꽃잎이 아주 작은 일명 '잎 안개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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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마詩魔』 2022-가을(13)호 <시마詩魔 1>에서

  * 유정(본명,박경옥)/ 2008년 『문파』로 등단, 수필집 『발자국마다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