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네모난 사과/ 박찬희

검지 정숙자 2023. 4. 9. 02:46

 

    네모난 사과

 

    박찬희

 

 

  거리에 아무도 없는 때에는 종종 방향을 잃는다

  어제가 언제였는지도 까마득하다

 

  모를 이유로 상심한 나무들이

  그늘을 쏟아내는 정오가 지나도록

  잊은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길을 찾는다

 

  길거리 간판을 읽다가 깨문 입술에서

  흐릿 배어 나오는 물안개의 맛

  잊었던 것들이 생각나는 자극

  혼자 있는 때에는 작은 자극에도 예민해진다

 

  하늘이 뾰족해진 날, 바람의 손톱이 훑고 간 후에

  무뎌졌던 통증이 도지듯 갑자기

  나무들이 길가에서 수군대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나무들도 아린 기억을 잊으며 산다는 것을 알았다

 

  잊은 길을 오늘 찾지 않아도 길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전언에

  말갛게 지워지는 공연한 불안

  한 그루 나무가 되어 그냥 서 있는 것도 과히 나쁘지 않다는 생각

  생각은 시들지 않아서

  혼자 서 있어도 심중에는 네모난 사과가 열린다

     -전문(p. 9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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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마詩魔』 2022-여름(12)호 <시마詩魔 1>에서 

   * 박찬희/ 2022년 인천문화재단 예술표현활동지원 선정 외, 시집『시간의 화석』『혼의 깡마른 직립』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