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나는 보고, 나는 쓰네/ 이향아

검지 정숙자 2023. 4. 7. 02:26

 

    나는 보고, 나는 쓰네

 

    이향아

 

 

  한낮은 달구어진 싸움터였고, 이제야 가라앉아 나는 보고 씁니다. 볼 수 없는 그대에게 투정할 수 없어서, 눈물에 절은 속만 고백합니다. 그대 이미 갔으니 내게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지나온 가슴에 패여 있는 흔적. 잊어버리자고, 잊어버리겠다고 씁니다. 이대로 나 살아갈 수 있을는지.

  수면은 꽃이 있던 자리만 파르르 떨리고 두고 간 향내로 밀려드는 현기증, 망초꽃 핀 강언덕은 돌아보지 않습니다. 절망이 석순처럼 자라는 밤이 오겠지요. 끝끝내 그립다고 쓰고 말았습니다. 대답이 없어도 궁금해 하지 않겠다고, 이 걸음 그대로 멈추지 않더라도 백수광부여, 내가 따라갈 한 사람이라고 씁니다.

    -전문(p. 17)

 

  해설> 한 문장: 이향아 시편들이 고전시가의 전통적 정서와 시시각각으로 교감하면서 인간 삶의 다채로운 국면들을 확대 재생산한다는 사실은 전체 작품을 통해 지속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 시들에는 삶과 죽음, 사랑과 이별, 고독과 신의, 허무와 회한과 같은 인생의 가장 근원적인 주제들이 시인 특유의 역사적 상상력을 매개하며 밀도 있게 제기된다. 특히 이 과정에서 그의 시는 배경 서사의 창조적 변주를 통해 시적 의미망을 넉넉하게 확보한다. 이른바 전통적 정서와 현대적 감각이 시종일관 공존하는 양상을 보여준다. // "백수광부여 내가 따라갈 한 사람"이라는 시구는 이 시편들이 최고最古의 서정가요를 직접적으로 매개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이들 작품에서 백수광부의 죽음은 변함없이 슬픔과 애도의 대상으로 수용되고 있는 것이다(p. 115 // 116) (이성천/ 문학평론가, 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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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순례자의 편지』에서/ 2023. 3. 15. <이지출판> 펴냄

  * 이향아/ 1963-1966년 『현대문학』 3회 추천으로 등단. 시집『캔버스에 세우는 나라』등 24권, 에세이집『새들이 숲으로 돌아오는 시간』등 18권, 문학이론 및 평론집『창작의 아름다움』등 8권, 영역시집『In A Seed』와 영한대조판『By The Riverside-저녁 강가에서』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