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두꺼운 책 외 1편/ 이학성

검지 정숙자 2023. 3. 25. 02:17

 

    두꺼운 책 외 1편

 

    이학성

 

 

  내가 아는 소녀는 시냇물 소리를 사랑했네

  여미듯 개울가에 앉아 책 읽기를 즐겼지

  아직 난 또렷이 기억하고 있네

  소녀가 책을 읽어야 앞 개울은 소리를 내며 흘러갔지

  그 여울의 나무 그림자 아래,

  그곳에서 부쳐온 소녀의 편지를 간직하고 있네

  세상은 참으로 두꺼운 책이어서

  함의와 귀결이 제각기 달라진다 해도

  시냇물처럼 끝까지 읽어가야 해요,

  간략하나 단정한 글씨가 거기 씌어 있지

  세월이 아무리 흐른들 편지는 버릴 수  없어

  어디에도 마음 둘 곳 없는 날엔

  벽장 속 상자를 꺼내 겉봉을 열곤 하지

  그러면 갈래머리 소녀가 떠오르고

  슬그머니 책갈피를 넘길 적마다

  흐르던 여울물 소리가 어울려 새어 나오네

  그 소리는 세상의 귀를 적시고

  먼 우주 끝으로 지금도 흘러가고 있지

  그러니 소녀는 여전히 개울가에 앉아 책을 읽고 있다네

  언제가 돼야 마칠지 모르는 두꺼운 책을.

     -전문(p. 6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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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녁의 신

 

 

  알맞은 어느 저녁 당신께서 찾아오셨다. 손때 묻은 지팡이를 세우더니 나직이 저녁 한 끼를 청하셨다. 어디서 그런 겸양한 목소리를 듣겠는가. 갑작스런 당신의 현현顯現에 식구들 모두가 크게 놀랐다.그럼에도 아비가 침착히 나서 당신을 식탁으로안내했다. 때마침 부엌의 화덕에서는 스튜냄비가 당신을 괄게 끓어 올랐고, 당신께서 막 앉자마자 실내의 등불이 환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당신은 불빛이 어룽대는 식구들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다보시곤 제일 수줍어하는 아이를 가리키며 나이와 이름을 물으셨다. 그러곤 붉게 달아오른 막내의 뺨을 어르며 가정의 화목을 축원하셨다. 허름한 식탁 위에 놓인 음식들은 기름지지 않아도 저마다 정갈했으며 질그릇 부딪는 소리가 이따금 창밖을 떠도는 바람소리와 어울렸다. 어느덧 식사가 끝나갈 즈음 아비가 무거운 입을 열어 어디로 가시나이까, 하며 당신의 행로를 물었다. 당신께서는 갈릴리 호수 너머의 나사렛으로 향하는 길이라고 하셨다. 그러나 우리 마을에서 그곳까지는 얼마나 먼가. 더군다나 어두컴컴하게 밤이 깊어가고 있지 않은가. 그렇지만 당신께서는 우리의 만류를 뿌리치셨다. 이윽고 숙연한 저녁기도를 마치고는 지팡이를 찾아 짚으셨다. 당신의 그윽한 눈동자 속에 애타게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이들이 내비쳤다. 아쉽게도 만남은 길지 않은 시간, 언제가 될지 훗날의 재회를 기약하기도 어려웠다. 컴컴한 바깥으로 향하는 당신께서는 아무것도 신지 않은 차가운 맨발이었다.  

    -전문(p. 4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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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저녁의 신』에서/ 2023. 3. 16. <도서출판 b> 펴냄

  * 이학성/ 경기 안성 출생, 1990년『세계의문학』으로 등단, 시집『여우를 살리기 위해』『고요를 잃을 수 없어』『늙은 낙타의 일과』등, 산문집『시인의 그림』『밤의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