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어느 시인의 귀향/ 이진엽

검지 정숙자 2023. 3. 24. 02:03

 

    어느 시인의 귀향

 

    이진엽

 

 

  도시는 회색의 너울에 갇혀 있고

  얼어붙은 길에는 눈발이 퍼붓고 있었다

  낡은 가방을 어깨에 둘러 멘 채

  천 필 무명이 깔린 은빛 빙판길로 나섰다

  젖은 호주머니 속으로 손을 찌를 때마다

  손끝에 와 닿는 차가운 동전 몇 낱

  그 싸늘한 기운을 온몸으로 전해 받은 채

  눈보라를 헤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먼 알프스에서 고향 슈바벤으로 돌아가는

  횔덜린, 그의 시 한 구절을 주문呪文처럼 되뇌며

  내 마음도 어느새 어머니의 품으로 가고 있었다

  가슴 깊이 가라앉은 유년의 숲과 호수

  그들의 깊은 잠을 깨우기 위하여

  시의 나귀를 이끌고 그곳으로 가고 있었다

  돌아보면 저 외로운 길

  어두운 벌판에서 보낸 숱한 시간들과

  생의 여울터에서 가랑잎처럼 맴돌던 모습이

  문득 내가 아니라 낯설게 느껴질 때

  언제나 귀향을 생각했다

  바람과 햇빛과 청보리가 넘실대던 고향

  신성한 대지의 울림이 조석같이 감춰진 그곳을

  나는 시의 열쇠로 조용히 열고 싶었다

  오, 새하얀 날개를 펼친 바위산

  그 설산雪山이 바라보이는 옛집의 마당에는

  아직도 어머니의 참빗이 흙속에 묻혀 있으리

  드센 눈보라에 휩싸인

  별들마저 얼어붙은 이 옹색한 시대에

  한 줄 시를 웅얼대며 이제 고향으로 가야 한다

  차디찬 눈바람에

  밤새 뼈를 꺾으며 울부짖는 겨울나무들

  그 앙상한 가지에 고뇌의 시간들을 묶어두고

  다시 먼 길을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된다

  내 조그만 시의 나귀

  그의 잔등에 쌓인 눈발을 거듭 털어주며

  햇빛 눈부신 저 근원에 닿기위하여

    -전문(p. 7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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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간 시 전문지 『사이펀』 2023-봄(28)호 <이 계절의 시인> 에서        

  * 이진엽/ 경북 구미 출생. 1992년 『시와시학』 신인상 & 199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 당선, 시집『겨울 카프카』 『그가 잠깨는 순간』『그 강변의 발자국』『낯선 벌판의 종소리』『아직은 불꽃으로』등, 평론집『존재의 놀라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