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새를 심었습니다/ 서안나

검지 정숙자 2023. 2. 26. 01:53

 

    새를 심었습니다

 

    서안나

 

 

  새를 받았지요 택배로, 뿌리에 흙이 묻어 있었어요.

 

  은행과 김밥천국과 데빌 피시방을 지나 도착한 새입니다.

  새가 아니라고 말해도 새입니다.

 

  설명서를 읽었죠.

  새, 이것은 명사, 유목형입니다.

  잘 깨지는 것, 씨앗이 단단한 것, 비정규직 냄새가 나는 것,

 

  갓 배달된 1년생 새를 심었어요. 무채색의 새는 눈이 어둡습니다. 검은 것들은 어둠을 치는 기분입니다. 새는 나쁜 계절 쪽으로 한 뼘씩 자라고, 종이 인형처럼 잘 찢어집니다. 고독한 비행의 예감 같은 것이 따라왔습니다. 

 

  새를 심었지요. 오렌지 맛이 나는 새를요. 새는 시들다 화들짝 살아납니다. 새를 오래 들여다보면 새싹 같은 乙을 닮았습니다.

 

  일주일에 물을 두 번 주었지요. 새의 눈동자가 조금 썩었어요. 얼굴을 매일 떨어뜨립니다. 새의 그늘이 점점 깊어집니다. 실직의 징조입니다.

 

  새를 두드리면 상자와 고양이와 단추가 감정노동자가 있습니다.

 

  나는 살아야겠다라고, 자기소개서의 내용을 수정합니다.

 

  乙은 당신을 지우고 내가 사는 저녁의 영광입니다. 동맹과 배반의 테이블에서 태어납니다. 내일은 새의 날개가 펼쳐지는 개화기입니다.

 

  빨리 죽은 것들은 오래 삽니다. 유목의 계절입니다.

     -전문(p. 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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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새를 심었습니다』에서/ 2022. 9. 30. <여우난골> 펴냄

  * 서안나/ 1990년『문학과비평』으로 등단, 시집 『푸른 수첩을 찢다』『플롯 속의 그녀들』『립스틱 발달사』, 평론집『현대시와 속도의 사유』, 연구서『현대시의 상상력과 감각』, 편저『정의홍선집 1, 2』『전숙희 수필선집』, 동시집『엄마는 외계인』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