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완벽한 시간/ 노춘기

검지 정숙자 2023. 2. 24. 02:51

 

    완벽한 시간

 

    노춘기

 

 

  잠에서 막 깨어나는 짧은 시간, 이 세계가 허물어지고, 다시 신화처럼 어제와 너무나 닮은 모습으로 일시에 구축되는 과정을 목격하는 순간은 얼마나 허망한가

 

  이 진실의 등 뒤로 텅 빈 하무가 아닌 것이 없었다는 것.

 

  밤의 적막 속에서 매일, 어제 없었던 것들이, 어제의 태양과 함께 사라졌던 것들이, 암흑 속에서 허물어졌던 것들이 얼굴을 들어, 나를 아는 것처럼, 사랑을 담아 인사를 건넨다.

 

  수고 많았노라 인사를 돌려줘야지. 다시 돌아오지 않는, 오늘만 살고 죽는 얼굴들에게. 내일 다시 눈을 뜨게 된다면, 새벽빛의 온기가 네 몸 위에 덮일 때, 다시 온전히 새로운 사람이 어제의 목소리를 끝내 입 밖으로 내어놓을 때.

 

  그 모든 인사들이 다시 시작되리라. 그러나 의심하지 말아야지. 이 사람이 어제의 내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어떤 믿음도 없이 눈을 뜨고 감아 왔다는 사실을. 쉽게 말하지 않아야지. 두려움 없이, 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을 향해서 고개를 꺾을 수는 없으니까.

 

  석유 랜턴의 심지를 올리면, 그 불빛 언저리로 파충류의 느릿한 숨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는 점점 느려지면서 별들이 회전하는 소리를 감춘다.

 

  어둠을 부르면, 옅은 불빛에 흔들리는 수풀 너머, 푸른 얼굴이 나를 본다. 이제 왔구나, 인사 건네며 손을 내밀어 본다. 흐릿한 인사의 말이 뺨을 만지며 지나간다.

 

  그리고 완벽하게 쓸쓸한 시간이 온다.

      -전문-

 

  해설> 한 문장: 그렇다. 시인은 제 삶의 천태만상에서 일어나는 '진실'과 결부된 무수한 말과 표정과 이야기들이 시간의 경과에 따라 변화하고 소멸하는 '과정' 전체를 공평무사公平無私의 눈길로 들여다보려 하는 것이 틀림 없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 오늘만 살고 죽는 얼굴들"로 빗대어진, 숱한 왜곡과 풍문들을 무시하거나 외면하려는 마음을 품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들이 남긴 내면의 상흔과 그 깨달음의 잔상들을 "밤의 적막 속에서 매일, 어제 없었던 것들이, 어제의 태양과 함께 사라졌던 것들이, 암흑 속에서 허물어졌던 것들이 얼굴을 들어, 나를 아는 것처럼 사랑을 담아 인사를 건넨다"라고 표현할 수 있는 허허롭고 넉넉한 마음씨로 감싸려 한다. 이는 마치 진실인 양 우리 모두를 기만하거나 왜곡하고 있었던 그 모든 속악俗惡의 '얼굴들'에게도 "수고 많았노라 인사를 돌려줘야지"라고 말할 수 있는 자유와 지혜, 그 웅숭깊은 깨달음이 현현하는 순간의 황홀경을 "완벽한 시간"이란 이미지에 빗대어 드러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따라서  "완벽한 시간"이란 "그 모든 인사들이 다시 시작"되는 시간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제'라는 시어로 표현된 과거의 시간만을 머물다가 사라진 무수한 '진실'인 동시에 허위의 '얼굴들'이란 그저 폐기 처분되어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 그냥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노라고 넌지시 말 걸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이렇듯 '어제'와 '오늘'이란 시가 한시적 시간만을 살다가 사라져 버리는 무수한 '진실', 달리 말해 무수한 오류와 착각과 거짓에 대해서도 '인사'라는 말로 형상화된 긍정성의 가치를 '돌려주려'하는 셈이다. 이는 시인이 시간의 풍화작용이 불러일으키는 '진실'의 무상함에도 불구하고, 그 투명성에 도달하려는 진중한 의식의 모험을 말없이 지속하고 있을뿐더러, 그것에서 벗어난 수많은 왜곡과 허위까지도 넉넉하게 받아안으려는 '소극적 수용력'의 주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p. 시 78-79/ 론 126-127(이찬/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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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너는 아직 있다』에서/ 2023. 1. 5. <파란> 펴냄

  * 노춘기/ 1973년 경남 함양 출생, 2003년『문예중앙』으로 등단, 시집『오늘부터의 숲』『너는 레몬나무처럼』『너는 아직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