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문, 서래*에게/ 김효은
조문, 서래*에게
김효은
어떤 국화는 노랗게 태어났지만 흰 국화가 된다 영정 앞 창백한 미망인의 얼굴 그녀가 미인이라면 조문과 위로는 희석된다 의혹은 매혹에 흡수되고 당신의 일부 때로는 당신의 전부가 붕괴된다 검은 벨벳 모자와 망사 장갑 이니셜이 수놓아진 흰 손수건은 오로지 그날을 위해 준비된 것 그녀의 기다란 속눈썹에 매달린 인공 눈물이 촉촉하게 반짝이다가 또르르 떨어진다
장례식장은 외진 곳에 숨어 있지만 납골당은 트인 곳에 캐슬이라는 이름을 달고 웅장하게 서 있다 납골당 건물의 외벽 유리창이 유난히 깨끗하고 투명한 것은 전광판이나 간판을 대신하기 위함이다 멀리서도 반짝이는 이정표는 사후를 유인한다 새들은 매일 유리창에 비친 모조 하늘로 날아와 부딪힌다 죽는다 쌓인다 주검을 치우는 사람의 손끝에서 달력은 교체되고 어둠은 짙어진다
삼우재의 오후 낙엽에 불을 지펴 상복을 태운다 재가 날리고 만추가 저문다 면사포 닮은 상강 지나 유골 같은 흰 눈 내린 대설 지나 유독 살이 올랐던 만월이 지면 동지가 온다 까마귀를 먹고 길고양이를 먹고 심장을 땅에 묻고 밟아주면 화색 돋은 해는 모가지가 길어지겠지 피 묻은 창을 닦고 서쪽으로 난 유리문을 닫으면 동쪽에서 새로운 당신이 날아온다 구름처럼 파도처럼 밀려오는 날개의 기류를 느낀다 풍속을 즐긴다 바다 냄새를 잔뜩 묻혀온 새의 목을 힘껏 끌어안았다가 푼다 교살을 보류한다
어떤 겨울은 가을보다 먼저 시작된다는 그런 글조각을 달력에 새긴다 어떤 이별은 만남보다 먼저 시작된다는 작년의 글조각은 편집되었다 12월의 어느 아침이다 미망인이 거울을 보며 입술을 다물었다가 편다 턱선을 낮추며 글썽이는 표정을 연습한다 사십구재에 입을 드레스 코드를 생각하며 천천히 창가로 다가선다 레이스 커튼을 젖히고 참문을 연다 손차양을 한다 반지 자국이 하얗게 빛난다
-전문(p. 44-45)
* 박찬욱 감독의 영화 <헤어질 결심>92022)의 여주인공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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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시』2023-1월(397)호 <신작특집> 에서
* 김효은/ 2004년 ⟪광주일보⟫ 신춘문예 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