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행성에서/ 김춘리

검지 정숙자 2023. 2. 7. 00:48

 

    행성에서

 

    김춘리

 

 

  비둘기가 앉는 순간

  창문이라는 거주가 시작되었다

 

  배워본 적 없는 오토바이는

  퀵서비스의 속도로 멀어지는 행성이어서

  가스와 먼지로 둘러싸이고

  포장된 우리는 흔들리고

  황급히 달리며 인사하는 것을 잊어버렸다

 

  기상관측소에서 파도가 밀려온다는

  경고문을 행성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주꾸미 먹물같이 관측이 불가능했던 일상들

 

  비탈은 취향의 문제이므로

  풍경을 자르면 취향이 사라졌다

  옥탑방은 구글 지도에 없는 풍경이어서

  굴러떨어진 적이 있다

 

  방지턱을 보지 못해

  굴러떨어진 뼈를 주우며

 

  우리는 이동하는 행성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스키드 마크가 희미해지기 전에

  전파망원경 밖으로 멀어지기 전에

  행성이라는 포장에서 나를 꺼내야 했다

    -전문-

 

  해설> 한 문장: 시집 『평면과 큐브』를 읽어간다는 것은 시인과 가장 대립적인 태도를 취할 때조차 언어와 벌이는 그의 전투에 참여하는 치열한 과정이다. 김춘리 시인은 언어가 벗어날 수 없는 기본적인 자질들을 가장 극단의 지점에 이르기까지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작품들에서는 인과의 관계가 쉽게 단절되면서 그것을 따라가던 의미들과 충돌하고, 다른 차원의 이미지들과의 만남이 자유로운 도약을 감행한다. 이는 단어 운용의 특징이면서 작품을 구성하는 기본 원칙, 그리고 세계를 감각하는 그만의 방식으로도 자유롭게 말해질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시를 하나의 의미 구조로 읽어가기 위한 우리의 노력과 충돌하는 지점에서 이같은 시인의 특징이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난다는 사실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구조'는 '의미'가 될 수 없으며, '의미'는 '실재'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문제는 인과 체계 속에서 이 관계들을 이해하고자 하는 우리의 기존 인식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시집 『평면과 큐브』를 통해 우리가 목격하게 되는 것은 관계들의 붕괴 현장이다. 그리고 김춘리 시인의 세계는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 바로 이 한 지점에서 무한히 태어나고 있을 뿐이다. (p. 시 108-109/ 론 126-127(남승원/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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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평면과 큐브』에서/ 2023. 1. 9. <한국문연> 펴냄

  * 김춘리/ 강원 춘천 출생, 2011년 《국제신문》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바람의 겹에 본적을 둔다』『모자 속의 말』, 공동시집『언어의 시, 시와 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