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곁/ 조영란

검지 정숙자 2023. 1. 22. 01:45

 

   

 

    조영란

 

 

  바람이라고 하면 휘청일 것 같고

  소나기라고 하면 한때라는 젖은 제목만 얻을 테니

 

  불쑥 끼어든 이름을 표현할 길 없어서

  그냥 흘려보낸다

 

  가장 가까운 곳이 가장 먼 곳이 되어버린

  눈부신 날의 아득함처럼

 

  흘려보낸 것들은 아마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들

 

  다 식은 슬픔을 데워주듯이

  오랜 기다림을 힘껏 밀어내듯이

 

  누군가의 체온을 깊이 숨겨놓았을 것 같은 벤치 위로

  가만히 내려앉는

  나뭇잎 하나

 

  기척도 없이 와 있는 기척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느껴지는 온기처럼

 

  기억이 고요를 헤집는 소리라면

  그림자는 혼자라서 덧나는 어둠이라서

  나는 한참을 두리번거린다

 

  꼭 누군가 있는 것만 같다

     -전문-

 

  해설> 한 문장: 위의 시는 제목 그대로 '곁'이라는 어휘에 대한 느낌을 감각적이고 깊이 있는 비유로 표현하고 있다. 인상적인 것은 시인이 분명히 존재하고 누구나 공감하지만 표현하기 모호한 상황을 언어화하려 애쓰면서도 그녀의 언어로선 도저히 어찌해볼 수 없는 대상들을 "그냥 흘려보낸다"는 서술이다. 내 곁에 머물렀거나 스쳐 지나갔던 존재들을 "바람"이나 "소나기"라고 명명하는 순간, 내 곁을 누군가에게 내주었던 시간과 추억들이 퇴색하는 아이러니를 그녀는 놓치지 않는다. 굳이 언어화하지 않아도 그 느낌과 감각은 나에게 남아 있으니 "불쑥 끼어든 이름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느껴지는 온기처럼" 그대로 내버려두어 나의 곁에 온전히 머물 수 있게 한다. (···略···)   

  스피노자에 의하면 슬픔이라는 감정은 인간이 "존재하고 행위하고 살아내도록" 만드는 에너지가 될 수 있다. 슬픔은 "너도 나도 아닌" 우리의 관계에서 나와 타자의 취약성을 발견하고 서로의 불안을 보유하게 해준다. 서로의 불안을 이해하고 보유하는 행위의 확장은 아직 우리가 되지 못한 이들에게도 지속적인 말 걸기를 통해 우리라는 연대의 지평을 넓혀가는 윤리적 책임감과 관련이 있다. 슬픔을 공유하면서 생겨나는 우리의 확장은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의 단독성만 남은 세상의 질서를 흔들어 놓는 일이고 동시에 우리 안에 끊임없이 타자의 자리를 마련하면서 상호 변화의 과정을 이끌어내는 소명이 된다. (p. 시 64-65/ 론 120 · 121(장예원/ 문학평론가)

 

  -----------------------------

  * 시집 『오늘은 가능합니다』에서/ 2023. 1. 12. <문학의전당> 펴냄

  * 조영란/ 서울 출생, 2016『시인동네』로 등단, 시집『나를 아끼는 가장 현명한 자세』『당신을 필사해도 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