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환상이 깨질 때 외 1편/ 조숙향

검지 정숙자 2022. 12. 26. 02:00

 

    환상이 깨질 때 외 1편

 

    조숙향

 

 

  벽에 걸려 있는 백열전구가 흔들린다

  빛이 흔들린다

  어디선가 나방이 날아와

  백열전구에 부딪혀 날갯가루 흩어진다

  수천 개의  필라멘트

  수천 가지 색깔들이 눈처럼 내려앉는다

  하루살이 날아와 필라멘트의 열기를 빨아먹는다

  백열전구는 바람처럼 요동치다가

  제풀에 지쳐 터져버린다

  방바닥에 즐비하게 펼쳐진 백열전구의 뼈 조각들

  내 몸은 사슬에 묶인 채

  도무지 움직일 수 없다

  깜깜한 벽

  어둠이 내 몸을 통과한다

  근육이 아프다 뼈마디가 아프다

 

  정··· ···

 

  서서히 주변의 가구들이 윤곽을 드러낸다

    -전문(p. 10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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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지층

 

 

    1

  너에게서 나에게로 가는 저녁

  경계가 지워지는 하늘

 

  신선한 아침에 빛났던

  너의 눈동자에 모래바람이 분다

 

  너무 많은 밝음에서 너무 흔한 어둠으로

  서로를 통과하며

 

  흐린 고요를 남긴다

 

  짝을 잃은

  풍산개의 풀린 눈빛에 저녁이 담겨 있다

 

    2

  흰나비 떼가 날아오른다

  오늘의 일기 앞에서

 

  하늘을 물들이는 낯익은 새소리

  철 지난 진달래 꽃잎

  웃자란 새싹들

  버석거리는 소나무  입술

  쉴 곳을 잃어버린 바람이 내 뒤로 사라진다

 

  먼 산에 하얗게 얼음이 덮인다

    -전문(p.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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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오늘의 지층』에서/  2022. 11. 25. <푸른사상> 펴냄

  * 조숙향趙淑香/ 강원 강릉 출생, 2003년『시를 사랑하는 사람들』로 등단, 시집『도둑고양이 되기』, 동인지『이런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