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최선교_진정한 것이 뭐길래(발췌)/ 밤의 물체 주머니:이은규

검지 정숙자 2022. 11. 24. 02:23

 

    밤의 물체 주머니

 

    이은규

 

 

  단풍나무 씨앗이 여기 왜 들어 있을까

 

  친절한 재배법, 묘판에 파종하여 10㎝ 자랐을 때 세 뼘 간격으로 옮겨 심는다 발아가 시작되면 건조하지 않도록 물을 준다

 

  그 물체 주머니 있잖아요

 

  단추와 주사위 그리고 고무공, 조개껍데기와 돌멩이 사이에

  웅크리고 있던 씨앗 봉투

 

  지난가을 내내 헬렌과 스코트 니어링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책 제목은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그러나 나는 도무지 어렵기만 해요 아름다움도 삶도 사랑도 마무리도 웬일인지 그런 단어들을 떠올리면 괜히 마음이 뾰족해지고

 

  작은 시골 마을 버몬트에서 메이플 시럽을 만들어 자급자족했다죠 상상해봅니다 둥근 탁자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그사이 달콤했을 저녁의 공기를

  시럽이 눌어붙지 않도록 나무 주걱으로 오래 젓는 일상, 일생

 

  처음으로 함께 본 전시회 티켓과 여행 기념으로 나눠 갖은 네 잎 클로버 키링 그리고 산책길에 주은 반은 푸르고 반은 붉게 물든 단풍잎

 

  우리에게도 물체 주머니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탁상시계 건전지함에 한 사람이 숨겨놓은

  시간이 이렇게 흘렀군요, 라는 쪽지의 문장이 들어 있던

 

  나는 아직

  한 사람을 포기하지 않고 한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을 모르고

  몰랐으면 좋겠고

 

  버몬트숲 단풍잎이 붉게 물들어갈 텐데

  나는 지워진 한 사람의 이름을 오래 바라볼 뿐입니다

  이제 물체 주머니는 열리지 않아요, 밤

 

  단풍나무 씨앗도 잠드는

    -전문, 『현대문학』 2022-9월호

 

  ▶ 진정한 것이 뭐길래(발췌) _최선교/ 문학평론가

  이은규의 「밤의 물체 주머니」는 감각할 수 없는 거대한 추상 개념들을 일상적인 층위의 감각으로 전환하고자 한다. 아름다움이나 사랑 같은 단어들은 "도무지 어렵기만" 하고 "그런 단어들을 떠올리면 괜히 마음이 뾰족해"진다. '진정한 것'과 가까워 보이는 단어들을 거절한 자리에는 대신 사소하고 일상적인 풍경의 사물들이 배치된다. 아름다움이나 사랑 같은 추상 개념들은 직접적으로 지각할 수 없는 것을 붙잡아두려는 시도이다. 이 시도는 곧 그것을 소유하려는 욕망과 연결된다. 그러나 이은규의 시는 무엇을 포기하지 않고 그것을 사랑할 수 없다고 말한다. 바꿔 말하면, 소유하기를 포기할 때 비로소 사랑하기가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추상 개념들이 지칭하는 감각과 경험은 말 자체가 아니라, 두 사람이 만들었을 "메이플 시럽"이나 "둥근 탁자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의 뒷모습" 혹은 "달콤했을 저녁의 공기"를 상상하는 시도로 지각된다. (p. 시 246-247/ 론 259-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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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시』 2022-10월(394)호 <현대시작품상 이달의 추천작 / 작품론> 에서

  * 최선교/ 문학평론가, 202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