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비(부분)/ 김영산
백비(부분)
김영산
지구의 백비마저도 언젠가 먼지처럼 사라진다. 나를 누워 있게 이대로 두어라. 역사여 나를 일으키지 마오! 아무것도 쓰지 마오. 나도 몰래 내뿜는 흰 빛만 보아다오. 그것은 내가 내는 빛만이 아니다. 네 비를 비춰다오. 모든 비를 비춰다오. 격정의 시는 아직 무덤에 이르지 않았다! 내 비에 기록을 남기지 마라. 기록하는 순간 먼지 되리라.
- 부분 (p. 150-151)
해설> 한 문장: 시간이 흐르고 흐르면 제주도의 백비도 사라질 것이다. 친구의 무덤도 사라질 것이다. 이 시집도, 이 시집의 해설도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무위도식하려고 태어난 것이 아니다. 이 우주의 실존적 의미를 밝혀보려고 오늘도 시상을 떠올리고, 시를 썼다 버리고, 고치고 새로 쓴다. 우주가 왜 '있는' 것이냐고, 별이 왜 '있는' 것이냐고, 지구가 왜 '있는' 것이냐고 묻지 말기를. 그것은 시인에게 왜 시를 쓰냐고 묻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우문이다. 지금까지 6권의 시집과 3권의 평론집과 1권의 산문집과 1권의 동화집(『주먹 열매』)을 낸 중견시인 김영산의 이번 시선집은 분명히 그의 시적 행로에 있어 큰 전환점이 될 것이다. 앞으로의 시인의 행보에 관심을 갖는 이는 나 혼자만이 아닐 것이다. (p. 시 150-151/ 론 178-179) (이승하/ 중앙대학교 문창과 교수)
* 블로그주: 「백비」(始終- p. 143~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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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선집 『백비』에서/ 2022. 10. 17. <문학연대> 펴냄
* 김영산/ 전남 나주 출생, 1990년『창작과비평』으로 등단, 시집『冬至』『평일』『벽화』『게임광』『詩魔』『하얀 별』등, 산문집『시의 장례가 치러지고 있다』, 평론집『우주문학의 카오스모스』『우주문학 선언』『우주문학과 시』등, 제3회 황진이문학상 수상, 현)중앙대 겸임교수 & 한국예술원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