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꽃돌 외 1편/ 손준호

검지 정숙자 2022. 8. 26. 02:33

 

    꽃돌 외 1편

 

    손준호

 

 

  한 천년쯤 붉은 심장에 불 지피면

  돌에서도 모질게 꽃이 피나

 

  시들지 않는

  그러나 아무도 꺾어갈 수 없는,

 

  설상가상을 견디며 닳고 닳은 마음

  지울 수없는 문신으로 서로의 상처를 파고든 흔적

  박제, 라는 사랑의 방식이 화석이라면

  

  벙어리 냉가슴에 활활 벙근  꽃불을

  보라, 저 광염에 차갑게 은폐된 마그마의 불꽃을

  모두 숨기고 숨죽여 살았다

 

  진앙에서 멀어지며 에둘러 분화한

  모란, 해바라기, 장미, 매화··· 꽃송이의 여진들

 

  향기를 버리느라 자주 돌이킬 수 없었다

  색을 버리느라 끝내 눈이 멀었다

 

  벼린 꽃불로 돌의 뼈마디에 새긴

  짐승의 눈빛, 달빛의 울음, 낙뢰의 칼날

 

  접몽이었나, 어디선가 모시나비 한 쌍이

  돌의 깊은 적막을 열고 불현듯 날아드는 것인데

 

  한 천년쯤 참어讖語를 속으로 삭이면

  돌에서도 참하게 잎사귀  돋아나나

       -전문 (p. 34-35) 

 

 

     -------------------

    당신의 눈물도 강수량이 되겠습니까

 

 

  감내라는 말을 인내할 무렵이었다 두문과 불출을 번갈아 하느라 무료한 계절이었다 아침마다 안전안내문자가 차질 없이 배달댔고 확진자는 네 자리, 나는 제자리였다 왈칵, 나를 쏟고 싶어 울컥울컥 슬픔을 토했으나 당신은 닦아주지 않았다 지독한 절망은 소금에 절인 배추같이 숨 죽었다

 

  나는 승선하지 않았지만 표류하고 있었고 암초에 부딪힌 오늘은 산산조각 나고 있었다 십만 개 구름 조각  부딪쳐야 겨우 빗방울 하나 만든다는데, 우리는 얼마나 마주쳐 눈물 한 방울 생산하는 것일까? 당신의 눈물도 강수량이 되겠습니까

 

  강수량, ······ 싸락눈, 이슬, 서리, 안개 등 포함

  비가 온다 안 온다 50% 확률, 안이 없어 밖으로 나돌던 때가 있었다 먹고 사는 게 흐린 날들이었다 물고기가 부러워, 울어도 표가 안 날 테니까 당신이라는 항체가 정맥에 흐르면 불안한 미래에 면역이 생겼다 비를 화단에 뿌리면 예후가 좋았으면 해요

 

  새들은 비가 와도 우산을 쓰지 않았다

  비 오는 날 안경이 잘 닦이는 것은 마음 한구석 습기가 이스트처럼 부풀어 올라서인데, 새들은 귀가  없지만 노래한다 98.3 메가헤르츠 주파수를 비틀어 라디오를 틀면 날아오는 신청곡, 비와 당신을 이어폰에 꽂고

 

  우산은 한쪽으로 기울었다

  한 어깨는 젖기 마련이고 어떤 방편도 없이 왼쪽에서 걸었다 정강이까지 파도가 출렁이다 빠져나갔다 우산이 수련처럼 거리에 뿌리 내려 동동 그림같이 유영했다 불쾌지수가 불콰하게 올라서

 

  윈도 브러쉬는 지우개처럼 기억을 당겼다 밀어냈다 공책 같은 차창에 주저리주저리 활자를 파종하는 빗줄기, 그걸 눈으로 읽으며 중얼거리는 사람이 있고 그의 속을 드나들며 젖은 한숨을 꺼내오는 사람이 연필처럼 서 있다 밑창이 새는지 양말이 축축해서 "밥이나 먹을래요?"

  안부: 어디 막힌 곳 없는지 점검하는 것

      -전문 (p. 24-25)

 

     ------------------   

   * 시집 『당신의 눈물도 강수량이 되겠습니까』에서/ 2022. 8 10. <시산맥사> 펴냄

   * 손준호/ 1971년 경북 영천 출생, 2021년『시산맥』으로 등단, 시집『어쩌자고 자꾸자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