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까닭 외 1편/ 김태신

검지 정숙자 2022. 8. 24. 01:33

 

    까닭 외 1편

 

    김태신

 

 

  깡통을 차면서 본다

  까닭이 팽팽 굴러가는 것을

  제멋대로 굴러가

  멎으면 집요하게 나를 쳐다보는 것을

 

  바짝 마른 풀잎같이 버석거리는

  난해한 삶의 의문

  차고 불온한 안개 속 실종失踪의 거리에 있다

  속부터 타오르는 숯덩이

  만질 수도 없는 뜨거움이

  목마른 입안에도 있어 까닭은 성가시다

 

  사람들이 모두 지나간 호숫가에

  붉은머리오목눈이처럼 까닭은 앉아 있다

  낡고 다 헤진 바짓단을 적신 채

  찬 호수에 발 담근 나를

  갈대 사이 초병의 눈으로 까닭은 쳐다본다

 

  길이 길에게 묻는다

  알 수 없는

  까닭, 먼지처럼 뽀얗게 만지지 못할 물음표

     -전문 (p.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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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 모임

 

 

  크리넥스 갑티슈를 빼 듯

  소년이 대문 뒤에서 열까지 세는 동안

  3월이 떠납니다

  개나리는 피어 어깨도 무릎도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습니다

  소리 없이, 반가운 편지를 읽는 소녀처럼

  군데군데 벚꽃은 피어 시린 생의 걸음을 가볍게 합니다

 

  오늘 어쩌다가 남해 동백의 붉은 꽃을 봅니다

  3월의 허기진 주머니는 저문 창밖을 보는 습관처럼 헐렁합니다

  입술 깨물어도 목련은 떨어지고 흘러가는 구름인 양 서럽습니다

  미세먼지에 끝내 무너지는 하루지만,

  밤 조명 비친 벚꽃의 밤은 화려합니다

  모두 여기 모이세요

  3월이 떠난다고 우리까지 떠나겠습니까

 

  어디선가 숨 가쁘게 달려오고 있을 4월

  그 봄날이 오면 보일러 켜지 않아도 방은 따뜻할 것입니다

  3월의 햇살이 담벼락을 더듬고

 

  29, 30, 31일이 곤두박질쳐도

  2층 건물 옥상 빨랫줄에는 할머니의 물방울 치마가 걸립니다

  우리 가족은 4월 초순에 모이기로 합니다

      -전문 (p. 68-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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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백지에 물들다』에서/ 2021. 11. 24. <시선사> 펴냄 

  * 김태신/ 1956년 경북 대구 출생, 2018년『시선』으로 등단, <시 가꾸는 마을> 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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