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 세 평 외 1편/ 한영수
땅 세 평 외 1편
한영수
대장, 좋은 생각이 났어요 가지고 있는 책들을 한곳에 모아 불을 질러 버립시다
조르바의 생각이 아니더라도
책 무덤이 필요하다
내게도 천장 높이 짊어진 아파트 벽돌이로 세우고도 남은 어깨에도 걸리고 발에도 채는 아침에도 새끼발가락이 부딪혀 멍든
책 더미가 있어
한곳 땅이 필요하다
저울에 달거나 쓰레기가 아닌 예의를 갖추어 화장하고 죽은 것들이 꽃을 피워
뭔가를 좀 알게 되는
한 평은 작고
세 평쯤 욕망해도 큰 잘못은 아니겠지
재를 묻은 세 평 땅에 방울토마토를 심으리
방울방울 안팎이 붉어 산들바람에 흔들리다가 거센 비보라에 몸부림도 쳐 보는 자유
하지만 영영 작별이 그리 쉽나
한곳 땅이 없어 차라리 다행인가
-전문 (p. 94-95)
* 대장, 좋은 생각이 났어요. 가지고 있는 책들을 한곳에 모아 불을 질러 버립시다. 그러면 뭔가를 좀 알게 되지 않을까요?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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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 카인의 죄
바로 그때 폭발소 저유소에 대해
타 버린 휘발유 260만 리터에 대해 43억 원 손실에 대해
17시간 동안 화염과 검은 연기와 공포에 휩싸인 도시에 대해
경찰의 손가락은 스리랑카인을 가리켰다
카인의 아들인 죄
스리랑카에서 태어난 죄
이국의 노동자가 된 죄
한번 살아 보자 풍등을 날려 보자
터널 공사장에서 새벽부터 일한 죄
그날은 인근 초등학교에서 '아버지 캠프'가 열리고 지난밤 풍등을 띄우고
저도 모르게 하늘을 올려다본 죄 그때 하필
달무리는 아내를 낳고 아빠를 부르며 달려오는 아들을 낳고
그래, 나도 멋진 아버지가 되어 보자
우리도 한번 풍등을 날려 보자
밤하늘을, 어둠을
제대로 한번 날려 버리자
풍등을 쫓아간 죄
풍등 하나를 주운 죄
풍등을 날린 죄
꿈을 꾼 죄
꿈이 얼마나 비싼지 모르고
둥실 떠오른 죄
-전문 (p. 4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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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피어도 되겠습니까』에서/ 2022. 8. 1. <파란> 펴냄
* 한영수/ 전북 남원 출생, 2010년『서정시학』으로 시 부문 등단, 시집『케냐의 장미』『꽃의 좌표』『눈송이에 방을 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