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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형엽_종교적 신성과 그로테스크 미학(발췌)/ 기타가 있는 궁전 : 이재훈

기타가 있는 궁전      이재훈    아버지가 기타를 연주하십니다. 나는 아버지의 다리 밑에 누워 있습니다. 기타에서 떨어지는 마른 고독이 목젖을 열게 합니다. 노래를 부릅니다. 말들이 우르르 목덜미로 떨어집니다. 말들이 저 밖으로 퍼지지 못하고 등위로 차오릅니다. 나는 말 위에 떠 있고, 아버지는 저 말 속에 계십니다. 내가 뱉어놓은 검은 말 속에서 기타를 연주하십니다. 말이 진화하면 물이 된다지요. 고도로 단련된 연금술인 셈입니다. 허공에 산화되어 사라지는 말을 만들어냅니다. 그때 비로소 저는 말을 배웠습니다. 내 말은 이미 물이 되었습니다. 물 속에서 기타 소리가 들려옵니다.  아버지가 기타를 연주하신 곳은 궁전이었다고 합니다. 그 궁전의 돌계단이 너무 높았지요. 다리가 아파 노래를 불렀습니다. ..

독립▼/ 최백규

독립▼     최백규    컨베이어 위로 구름이 흘렀다 빵과 우유를 삼키다 학교에서 제적되었다는 문자를 읽은 날이었다 그해 나는 자주 침상에서 뒤척였고 여러 공장을 번갈아 다니며 최저임금마저 떼였다 조립과 검수와 포장의 연속이었다 철야 후 공구 골목에서 이따금 쇳소리가 울리고 아침 공기도 적당히 산뜻했다 영화 상영 직후같이 비슷한 표정의 일용직들이 길 건너편으로 흩어지는 모양이 어지러웠다 그 시절에는 다세대주택 창고에 식물처럼 세 들아 살아도 괜찮았다 배가 고프면 수돗물을 마셨고 밑창이 떨어진 신발을 신으면 빗물에 발이 젖어 뿌리부터 썩어 들어갔다 학교에서 제적된 것보다 천장에서 비가 떨어지는 것이 훨씬 큰일이었다 낮이면 식탁 위로 밤이면 이불 위로 쏟아졌다 먹고살기 위해 그곳에서 자고 일어나 다시 일하..

혼자 가는 먼 집▼/ 장이지

혼자 가는 먼 집▼        고故 허수경 선생님께    장이지    우리기 저마다 홀로 길을 떠나야 해서 밤마다 서러운 소리를 해도, 홀로라는 것은 언제나 둘을 부르는 것이어서 아주 술프지만은 않습니다 길 위에는 만남이 있고 그 만남 끝에는 먼지와 검불, 재가 내려와 덮이는 온전히 시간이라고도 공간이라고도 할 수 없는 차원이 있고, 그 만남 끝에는 당신이라는 말이 있고 그 말은 아리고 쓰라린 것이기는 하지만······ 그 말에는 언제나 집이 있습니다 어느 날 지나온 집을 떠올리며 나라는 것은 없고 나라는 것은 단지 과정이구나, 나는 머물 집이 없구나 하는 생각에 북받치는 것이 있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뒤돌아 보면 사라지지 않고 언제나 멀어지고 있는 집    -전문, (p. 41)  ..

푸른 옹기/ 안이숲

푸른 옹기      안이숲    옆구리에 유통 기한 하나씩 흉터처럼 찍혀 있는데  나는 나의 유통기한을 기억해 본 적 없다   할머니는 몇 대째 이어 내려오는 내 몸속 물이  씨간장이라고 명명해 주신 적이 있지만  씨가 무엇인지도 모를 어린 나이부터 서리 맞는 일을 배웠다   가끔 몸을 씻겨주는 소나기를 피부에 새겨 넣기도 하고  바람이 전해주는 먼 곳의 이야기를 담아  씨의 근원을 만들었다  씨란 할머니의 그 윗대 할머니의 고함소리  한 번씩 뚜껑을 열 때마다 세상 모두를 달이고도 남을 만큼 짰다   꽃잎 하나 떨어지지 않는 날에는  우두커니 서 있는 일도 허기가 져서  무두질해 부드러워진 옹기 한 벌 걸쳐 입고 먼 섬으로 떠나고 싶기도 하고  옹기를 반으로 뚝딱 잘라  양산을 만들어 쓰고 도시로 쇼핑..

정재훈_호모 포엣이 되기로···(발췌)/ 보도블록이 모르는 이유 : 권성훈

보도블록이 모르는 이유      권성훈    금이 간 빗방울들이 모여드는 골목  지층이 말로 입을 덮고 있는 보도블록   고여 들면서 적요하게 번져오는 수액처럼  그사이 젖지 않을 만큼 잦아들고  한 번도 새기지 못한 축축한 이별을 나누어 가졌다   그대로 있겠다는 응답뿐인 약속을 베어 물고  떨이는 살점을 파고드는 틈새로 쓸어 담는다   거기서 닫힌 것이 있는데 열어본 적 없는  서로를 이어붙이며 만났던 조각난 서약이  불안한 퍼즐같이 맞춰지며  통행을 위해 통하는 그래서 머물지 못했던   애초부터 일상을 풀어내거나 인도하지 못하는  꿈을 나올 때 씹다 버린 껌처럼  퉁퉁 부어오른 표지판 배치같이 일글러진 변형도  아직 채우지 못한 상처로 아문 구상물을 붙들고 있다   나란히 안쪽에서 생겨나 바깥으로 ..

빈 칸/ 백은선

빈칸     백은선    청아 우리 그런 얘기 했었잖아. 시나리오 구상하려고 너와 카페에 마주앉아 죽치고 있던 날.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고 온통 젖어 어두워지는 창밖을 보면서. 사랑에 대해 쓰고 싶다 했지.   서로 사랑에 빠지면 투명해지는 병에 걸리는 거 어때? 보통 영화 보면 사랑을 해야만 병에 안 걸리잖아. 막 나쁜 피나 랍스터 글구 렛미 뭐더라 그 일본 작가 원작 영화도 비슷한 얘기잖아. 근데 이건 반대로 사랑하면 병에 걸리는 거지. 투명해져서 만나도 모른 채 스쳐지나가겠지. 사랑하는 사람을 계속 보려면 사랑하지 않아야만 하는 거야.   소녀는 같은 반 여자애를 좋아하는데 안 좋아하려고 애를 쓴다? 일부러 딴 데만 보고 말도 안 하고 그러는데 어느 날부턴가 손끝이 투명해지기 시작하는 거지. 그런 ..

정과리_또 하나의 실존···(발췌)/ 그리고 오른쪽 눈을 감았다 : 전봉건

그리고 오른쪽 눈을 감았다      전봉건(1928-1988, 60세)    산골짜기에서 자랐다고 하였다.  그는 이따금 난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위로해주려고 했다.  그러면 그는 말하였다.         "소새끼가 죽었을게야······"  나는 그를 위로해주려고 했다.   탄대의 빈자리가 메워졌다.  몇 번이고 그는 철모 밑으로 숲을 들여댜보았다.  서로 가지를 펴는 나무와 나무 사이와  반사하는 금속과 일광도 보았다.   호壕들을 발견하였다.  그는 오른쪽 포켓에서 연필과 수첩을 끄집어내었다.   85밀리였다.  불발탄 한 알이 굴러내렸다.  나는 진출하였다. 11시 방향으로 40분간이 지나고······ 나는 정면 낮  은 능선위에서 가만히 낙하하는 따발총을 보았다.  나는 다시 왼쪽 눈을..

밤의 석조전/ 안희연

밤의 석조전      안희연    그곳에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밤의 석조전.   낮에는 가본 적 있다.모든 것이 매끄럽고 선명했다. 기둥의 수, 창문의 투명도, 호위무사처럼 서 있는 나무의 위치까지도.  낮엔 다 볼 수 있었다. 돌인지 자갈인지 모래인지.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무엇인지.   그래서 밤이어야만 했다. 백 년 전의 사람들, 백 년 전의 비, 백 년 전의 쇠락 앞으로 나를 데려간다면   모든 돌은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고. 나는 이 거대한 돌이 말하게 하고 싶었다.   티켓을 끊고 들어간 밤의 석조전은 인공적인 빛에 휩싸여 있었다. 야행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걸까. 밤의 석조전이 감추고 있는 밤의 석조전으로 들어가려면.   눈은 들여다 볼 수 있을 뿐 열지 못한다. 닫을 수 있을 뿐이다. ..

쇠비름 외 1편/ 윤옥란

쇠비름 외 1편      윤옥란    앞마당에 터를 잡은 쇠비름  오가는 발에 밟혀 꺾인 허리가 다시 일어섰다   어느 해 여름  손수레에 올챙이묵을 싣고 가던 어머니  트럭이 치고 갔다   숟가락이며 그릇들은 논바닥에 나가떨어졌고  어머니는 중환자실로 이송되었다   트럭의 육중한 바퀴에  살과 뼈와 내장은 밖으로 튀어나왔다  산소마스크를 낀 어머니  피 묻은 손바닥에 짓뭉개진 쇠비름을 꼭 쥐고 있었다   살아야겠다는 중심만은 끝까지 흔들리지 않았던 것일까   언제 어디서든지 살아야 한다는  힘들어도 참고 살고 봐야 한다는   어머니의 말씀대로  쇠비름이 누렇게 물들기 전 다시 일어나셨다   바닥이 쩍쩍 갈라지는 땡볕 더위에도  고개를 높이 쳐들고 노란 꽃을 피우는   뜰 앞 쇠비름  잠언처럼 읽힌다  ..

나비 운구(運柩)/ 윤옥란

나비 운구運柩     윤옥란    그는 젊은 날 육군 소위였다  전쟁 중에 한쪽 다리를 잃었다  나라는 그의 이름을 잠시 빛나게 해 주었지만  잃어버린 다리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수십 년 동안 목발을 의지했지만  총알이 박혔던 후유증으로  침상의 다리를 평생 떠날 수 없는 다리가 되었다   마른 가지처럼 딱딱해진 혈관조차 빛나는 기억을 거부하자  그는 말을 잃어버리고 허공을 응시하던 눈빛도 흐려졌다   침상에서 잠을 자고  생각을 하고 꿈을 꾸기도 하였으나  더 이상의 따스한 공존을 허락하지 않았다   끝내는 칭찬도 비난도 없이 이승을 떠나가는  바짝 말라버린 북어 같은 목숨 하나,  그의 향기와 노래를 기억하는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다   개미도 동료가 죽으면  아무리 먼 길이라도 동행한다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