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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락(群落)/ 박해람

군락群落      박해람    대부분 열매들은 동그랗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멀리 굴러가라는 뜻이다. 동그란 형태의 도움을 받든, 그도 아니면 운 좋아 살짝 경사진 내리막의 도움을 받는 최대한으로 슬하에서 벗어난 그 한계점에서 모여 사는 군락지들, 나무들, 식물들의 마을인 군락지를 만날 때마다 모두 타고난 형태와 행태에서 멀리 벗어나지 못하는 천형들이 있다는 사실을 곱씹는다.   언젠가 제주도에서만 자생하는 문주란에 대한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문주란은 썰물 때에만 그 열매를 떨군다고 한다. 섬을 떠나 더 넓고 먼 뭍으로 가라는 뜻이 담겨 있겠지만 군락의 가장 큰 요건 중 하나는 매개媒介와 날씨가 아닐까 한다. 인간과 달리 식물은 날씨가 모국이고 고향일 것 같다.   모이고 흩어지는 일에는 다양한 ..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마라/ 나태주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마라      나태주    너,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마라  오늘의 일은 오늘의 일로 충분하다  조금쯤 모자라거나 비뚤어진 구석이 있다면  내일 다시 하거나 내일  다시 고쳐서 하면 된다  조그마한 성공도 성공이다  그만큼에서 그치거나 만족하라는 말이 아니고  작은 성공을 슬퍼하거나  그것을 빌미 삼아 스스로를 나무라거나  힘들게 하지 말자는 말이다  나는 오늘도 많은 일들과 만났고  견딜 수 없는 일들까지 견뎠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셈이다  그렇다면 나 자신을 오히려 칭찬해주고  보듬어 껴안아 줄 일이다  오늘을 믿고 기대한 것처럼  내일을 또 믿고 기대해라  오늘의 일은 오늘의 일로 충분하다  너, 너무도 잘하려고 애쓰지 마라      -전문(p. 4)    ---------..

전철희_불안정한 세계 속의 사랑(발췌)/ 육짓것 : 죄금진

육짓것      죄금진    제주에 이주한다는 건 마지막 버스를 놓치는 기분이지요  스스로를 용서하는 느낌  여기선 그 이주민들을 '육짓것'이라 불러요  떠돌이 버릇은 끝내 못 고친다는 걸 알고 있는 거죠  집으로 가는 마을 버스는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고  자꾸 본전이 생각나서 노름판을 서성이는 느낌  견딜 수 없다면 다시 육지로 돌아가요  여기서도 직업은 있어야 하고  살림을 살아야 하고, 인맥도 만들어야 하고  불 꺼진 방에서 혼자 늙어갈 노후도 걱정해야죠  바다만 쳐다보고 있어도 될 줄 알았죠  오름의 억새꽃처럼 바람을 이기는 지혜라도 생길 줄 알았죠  육지에선 제주가 좋았고, 제주에선 육지가 그리웠지만  그런 말은 패배 같아서 누구에게도 하지 못했고요  나침반 같은 거, 이정표 같은 거 필요 ..

북소리 들려 명륜이 내려주는 풍경(부분)/ 김덕근

북소리 들려 명륜이 내려주는 풍경(부분)      김덕근    청주향교는 전국 향교 중에서 가장 가파른 곳에 자리합니다. 홍살문을 지나 외삼문에서 내삼문까지 경사도를 보더라도 평지 향교와 다르게 유교적 위계를 알게 해줍니다. 흔히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라고 합니다. 강학 공간이 앞에 있고 제례 공간인 대성전이 뒤에 있는 형식이죠. 위에서 보면 말발굽형인 청주향교는 대성전을 위한 높고 긴 계단의 연속입니다.  '향교 건축은 엄격하게 대성전을 축으로 위계에 따라 있습니다. 위계의 시작은 문과 담장을 통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낮은 향교의 담장은 방어적 수단이 아니라 영역성 표지 안 밖을 구분함을 구분합니다. 밖에서 훤히 보일 정도지만 향교의 중심축에서 대성전은 자궁처럼 가장 깊숙이 자리합니다.  높은 장소에..

한 줄 노트 2024.08.13

창덕궁(昌德宮), 구중궁궐 속으로(부분)/ 박상일

창덕궁昌德宮, 구중궁궐 속으로(부분)      박상일/ 청주대 역사문화학부 교수         창덕궁에 서양식 가구와 실내 장식이 도입된 1908년 무렵에 인정전의 내부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회흑색의 전돌을 깔았던 실내 바닥을 서양식 쪽마루로 교체하고 전등이 설치되었다. 출입문을 제외한 창문 아래의 외벽에 전돌로 쌓았던 화방벽이 철거되고, 대신에 목재의 큼직한 머름대와 궁판으로 바뀌었다. 또 창문 안쪽에 별도의 오르내리창을 설치하고 휘장을 달기 위한 커튼 박스도 만들어지고, 지붕의 용마루에는 대한제국의 상징 문장인 오얏꽃무의 5개가 장식되었다.  월대에는 전면과 좌우 측면에 계단이 있고 임금만이 오를 수 있는 전면부의 어계御階 앞면에는 당초문을 조각하였다. 그 중앙부의 답도踏道에는 봉황을 새겼다. 봉황..

한 줄 노트 2024.08.13

가시와의 이별/ 양재승

中     가시와의 이별     양재승    목구멍에 가시가 걸렸다 가시는 벽에 박힌 못처럼 빠지지 않는다 숨을 쉴 때도 가시가 느껴지고 물을 마실 때도 가시에 물의 뼈가 걸리는 것만 같다   가시는 고통의 옷걸이  가시는 아예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 시간이 갈수록 밑동이 굵어지는 것만 같다  아무리 잘게 씹은 밥알을 삼켜도 가시 뿌리에 걸려  밥알에서 자갈 부딪는 소리가 나는 것만 같고 흐물흐물 데친 푸성귀는 옷가지인 양 턱 걸리는 것 같다 손가락을 오그려 뽑으려 해도 잡히지 않고 핀셋으로 빼려 해도 보이지 않는 가시는   생선에 꽂힌 꼬챙이처럼 나를 옴짝달싹 못하게 한다   어쩌면 나는 미늘에 걸린 고기인지도 몰라  허공에 투명한 줄이 있어 저 하늘 위에서 누군가 그 줄을 순간 잡아챈다면  버둥거리는 ..

도깨비/ 박순원

도깨비     박순원    나는 얌전하게 나의 차례를 기다린다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  월화수목금토일  한놈 두시기 석삼 너구리 오징어 육개장   부지깽이나 몽당빗자루 같은 것들도 쓰다가 아무 데나 버리면 저 혼자 도깨비가 된다 (최명희, 『혼불』 중에서)    나는 얌전하게 나의 차례를 기다린다 주민센터에서 병원 외래진료 대기실에서 은행에서 우체국에서 번호표를 뽑고 순서를 기다린다 화면을 터치해서 음식을 주문하고 순서를 기다린다 387번 고객 27번 고객 515호번 고객 10273번 고객 삼백칠십오만팔천육백오십사번 고객 기다리다 기다리다 보면 순서가 온다 내 순서 내 차례   나는 대체 가능한 자원이다 대체 가능한 소비자가 대체 가능한 고객이다 부지깽이 빗자루 지게작대기 바가..

곰탕 한 그릇/ 고선주

곰탕 한 그릇     고선주    문예창작과 지망생인 딸내미가 올빼미가 됐다  뜬 눈 하얗게 지샜지만 날아가지 못했다  밤새 글 날갯짓하느라 기상은 없고 눈만 뜨다  점심을 맞는다  방문 열어도 모른 채  죽음보다 깊은 잠  밤새 잘 익은 글을 원했을 것이지만  한참 나갔던 글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멀리 줄거리를 뺀 줄알았는데  여전히 초입니다  늘 잘 익은 글을 소망했겠지만  풋내 가득한 글만 만진 것이다  그의 아버지도 사십년 넘게 글을 써 왔으나  여전히 곰삭은 글을 맞이하지 못했다   살면서 서로 피차 뜨거운 맛은  피해보자 약속하며  사춘기와 갱년기 간 일시 휴전을 선언한 뒤  곰탕 한 그릇 뚝딱 해치우고  포장 하나 해서 털레털레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조수석에 앉은 딸내미 무릎 위에  ..

혼자 먹는 식탁/ 최서진

혼자 먹는 식탁      최서진    세상은 왜 이렇게 조용하지   연연해서는 안 된다는 듯  혼자 먹는 저녁   슬그머니 실존한다, 이름 붙일 수 없는 고요 앞에서  나는 홀로 밥을 먹는 고독한 왕   봄 바다처럼 찻물이 끓는데  늙은 손목을 가진 왕은 꾸물거리고  뜨거움이 모자란 차를 마신다   왕은 밥을 먹으며 한 발로 다른 발을 긁는다  국물을 흘렸는데도 닦지 않는다  일방통행로처럼 시간이 만들어 가는  보이지 않는 것을 더 믿는 표정이 되어   더 '고독하세요' 왕이 명렬하고 왕이 듣는다   한없이 다정하면서 외로운 식탁에 앉아  고독한 왕은 책을 읽고 행운이 담긴 편지를 쓴다  가장 느리게 오고 있는 행운의 편지를 기다리며  봄 바다의 반짝임에 대하여  슬그머니 혼자서 중얼거리며     -전문..

휘민_시는 자기 신뢰와 신성의 만남( 대담, 한 토막)/ 지평 : 박형준

地平     박형준     석유를 먹고 온몸에 수포가 잡혔다.  옴팍집에 살던 때였다.  아버지 등에 업혀 캄캄한  빈 들판을 달리고 있었다.  읍내의 병원은 멀어,  겨울바람이 수수깡 속처럼 울었다.  들판의 어디쯤에서였을까,  아버지는 나를 둥근 돌 위에 얹어놓고  목의 땀을 씻어내리고 있었다.   서른이 넘어서까지 그 풍경을  실제라고 믿고 살았다.  삶이 어렵다고 느낄 때마다  들판에 솟아 있는 흰 돌을  빈 터처럼 간직하며 견뎠다.  마흔을 앞에 두고 나는 이제 그것이,  네 환각이 만들어낸 도피처라는 것을 안다.   달빛에 바쳐진 아이라고,  끝없는 들판에서 나는  아버지를 이야기 속에 가둬  내 설화를 창조하였다.  호롱불에 위험하게 흔들리던  옴팍집 흙벽에는 석유처럼 家系가  속절없이 타올..

대담 2024.0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