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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르크/ 안주철

함부르크         붉은 벽돌      안주철    작은 다리 여러 개를 건넜어요   낡은 벽돌의 집 아래 수로에는 키가 작은 물이 흘러가고 있어요  앉은 키나 선 키나 비슷하고요  오리들은 끝이 보이지 않는 수로를 거슬러 올라가고 있고요   밤에 가까울수록 노을은 붉은 벽돌로 쌓아올린 집 같아요   아무도 살지 않는 것 같아요  문이 없어서 오래오래 문을 찾아야 할 것 같고요    유리창이 없는데 은은한 빛 무리들이 날아다녀요  손을 뻗어보고 싶어요  저의 두 손도 날아다닐 수 있을지 모르니까   붉은 벽돌의 집은 사라지지 않나봐요  서서히 자신을 감추었다 서서히 자신을 꺼내놓기도 하니까요   수로 옆 잔디밭에는 낮에 책을 읽다 떠난 사람의 등이 자리를 옮겨가면서 희미해져가고 있어요   다시 여러 ..

다리가 긴 빗방울들/ 안주철

다리가 긴 빗방울들      안주철    비가 그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또 비가 내렸으면 하는   마음이 생겨요   기도를 하지 않았는데 상자 모양의 선물이에요  꺼내지 않아도 마음인지 알고요   다시 비가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다리가 긴 빗방울들이 계단을 내려오고 있는 걸까요   혼자 웃고  또 혼자 웃으면  단란한 혼자가 되기도 합니다   창문 너머의 흐린 날씨를 방충망을 통해 보고 있어요  흐린 날씨도 방충망으로 보면 촘촘하네요   내려오는 계단이 올라가는 계단과 같을 텐데  한 번 내린 비는 다른 계단으로 걷고 있는 듯해요  아주 작은 소리까지 주워가면서   하루종일 누워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제 스스로 절벽이 되는 듯해요   제가 쌓아올린 절벽에서 떨어져  이 세상에서 한번도 구경..

물그릇/ 길상호

물그릇      길상호    누가 머리맡에 가져다 놨나?  출렁이는 얼굴을 오래 바라본다  어지럼증이 잠깐,  아직도 담배를 못 끊었다고  다그치는 사람이 있어 다행이라고  고양이는 새벽부터 운다  울음이 휘었다가 퍼지는 동안  크게 하품을 한다  물그릇은 이제 졸음이 몰려오는지  큰 눈을 감았다     -전문(p. 56) ---------------------------  * 『시와경계』 2024-여름(61)호 에서  * 길상호/ 충남 논산 출생, 200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오늘의 이야기는 끝이 났어요 내일 이야기는 내일 하기로 해요』외, 산문집『겨울 가고 나면 고양이』외

의자를 빌려주는/ 길상호

의자를 빌려주는      길상호    발판이 필요해  신과 조금 더 가까이 있고 싶어   대문마다 대나무를 세워놓는 무당들  가난의 중심에 앉아 점괘를 보지   당신의 등을 내주면  한 발 높이 갈 수 있는데   증명사진을 찍으려 앉았는데  찰깍 순식간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신   바닥을 보는 일은 자신 없어  뭐라도 밟을 게 필요해   담을 넘어야 하는데  앞이 다 무너져 버렸어   페루에 가면  일인용 의자를 5000원에 빌릴 수 있다는데   태양과의 거리를 줄일 수 있다는데  낮이 없는 계층으로 태어났어   가계도를 유지하기 위해  더 견고한 거짓말을 하면   저 높은 곳에는 늘 꽃이 있었어     -전문(p. 54-55)   ---------------------------  * 『시와경계』 202..

격정의 세계/ 이서린

격정의 세계      이서린    새벽 2시, 소리 없이 깜박이는 빨간 점멸등. 24번 국도에 비상등을 켠 차가 멈추었지. 여자가 내리고 남자가 따라 내리고 마주 선 두 사람은 말이 없고, 여자가 갑자기 도로 한가운데 딱, 서는데 그대로 검은 허공에 스며드는 것 같았지. 멀리 상향등을 켠 차가 달려오고 남자는 황급히 여자를 끌고 도로 밖으로 나오고, 몹시 빠르면서 격앙된 손짓, 여전히 말은 없고 거칠어진 숨소리. 적막한 시골 국도의 밤에 그들은 오로지 손짓과 몸짓, 표정으로 감정을 전달하더군. 손과 손이 부딪치는 소리, 숨과 숨이 뒤섞이는 소리, 터질 듯 붉어지는 얼굴과 격렬한 수어手語 사이, 후두둑 서로의 등을 끌어당기는 슬픈 손길. 두 사람의 검은 실루엣 저편, 비에 젖은 순한 짐승들이 울기 시작했어..

청담 순호의 마음 이해와 정화 인식(부분들, 다섯)/ 고영섭

청담 순호의 마음 이해와 정화 인식(부분들)          『청담대종사전서』 (전11권)를 중심으로          고영섭    청담은 평소에 6바라밀을 좋아하였고, 그 가운데서도인욕바라밀을 수행의 기치로 삼아 이를 적극 실천하였다. 그는 누가 뭐라하든 누가 헐뜯든 간에 인욕이었다. 누가 욕을 하건 누가 혹시 때리더라도 그는 조금도 흔들림 없이 참았다. 이 때문에 그는 '인욕보살'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정화 불사만 해도 당시 송만암宋曼菴 교정은 '수행승'과 '교화승'으로 양분해서 점진적으로 정화해 가자고 했다. 하지만 그는 선학원에서 제1차 수좌대회를 열고 효봉 대선사와 의논하여 '불법에는 대처승 없다'고 대처승 문제를 일거에 해결하자고 하였다. 이 주장은 수좌대회에서 합의되어 청담은 이후 이승만 대통..

김영임_범선이 되고 싶은 시(발췌)/ 비극의 위치▼ : 박세미

비극의 위치▼      박세미    당신은 어떤 방식으로 움직입니까  태풍처럼 포물선을 그리며 휘돕니까  숲속 오후 기분 좋은 토끼처럼 뛰어다닙니까  아니면 언제나 눈꺼풀처럼 박입니까   당신이 내게 다다르는 경로를 짐작하지 못하므로  이불을 펄럭이고  형광등을 켜고  꾸벅꾸벅 좁니다  손에 든 펜이  당신의 좌표를 점치는 동안   오늘은 먼지를 잔뜩 마셨습니다  먼지의 성분을 헤아려보면서···  당신이 포함되었다는  폐에 파고든 당신을 영원히 배출할 수 없다는  확신 속에서···  깨끗하게 씻긴 폐를 양 날개 삼아 날아오르는  꿈을 꿉니다   돌연  날개가 거침없이 부풀어 오를 떄  나는 당신과 동시에  터지길 바랍니다    -전문-   ▶범선이 되고 싶은 시(발췌) _김영임/ 문학평론가   "비극위 ..

귀를 대고 진찰하는 아이/ 이민배

귀를 대고 진찰하는 아이      이민배    그 의사는  청진기 대신 귀를 대고 진찰한대   건강한 심장 소리를 들으면  폭신한 가슴 위에서 부둥켜안고 잠을 잔대   그 의사를 좋아하는 엄마는  설렘으로 기뻐 뛰는 심장 소리에 놀라 깰까 봐  숨소리도 살금살금  발소리도 살금살금   새근새근 자는 귀여운 모습만 봐도  엄마의 피곤은 사라진대.   정말 훌륭한 아기 의사야!     -전문(p. 67)     --------------   * 『문학매거진 시마 SIMA』 2023-가을(17)호 동시)>에서   * 이민배/ 2020년 『한국문학예술』에 동시 당선

동시 2024.08.21

침묵의 벽/ 강영은

침묵의 벽      강영은    세상의 가장 낡은 귀퉁이라도 되는 듯  지팡이를 내려놓은 노인과  웅크린 몸을 잠 속에 묻은 개가  단단하게 빗장 건 門에 등을 기대고 있다.   그들은 지금 벌어지지 않는 입술과  깊이 모를 눈동자로  서로의 벽을 고스란히 끌어안는 중이다   손은 없고 가슴만 있는,  눈은 없고 눈물만 있는, 벽의 힘으로  면벽의 등을 쓰다듬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관계여,   방금 지팡이를 내려놓은 노인의 입으로  더 이상 짖을 수 없는 개의 입으로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門의 입으로  말하건대,   나에게도 부수고 싶지 않은 벽이 있다.  등이 허물어질 때까지 기다려 달라.     -전문(p. 148-149)    ---------------------------  * 『현대시』..

이승희_무한을 향해, 무한의 너머를 향해(발췌)/ 설계 : 강영은

설계     강영은    나는 내가 빈집일 때가 좋습니다.   침묵이 괴물처럼 들어앉아 어두운 방을 보여줄 때 고독한 영혼이 시간과 만나 기둥이 되는 집, 증거 없는 희망이 슬픔과 만나 서까래가 되는 집,    우주의 법칙을 속삭이는 별빛과 그 별빛을 이해하는 창가와 그 창가에 찾아든 귀뚜라미처럼 우리는 하나의 우주 속에 들어 있는 벌레라고 우는 집,    희고 깨끗한 미농지를 바른 벽이 도면에 있어 닥나무 껍질에 둘러싸인 물질의 영혼처럼 영혼의 물질처럼 나는 당신 안에 있고 당신은 내 안에 있어 충만한 집,   내가 알고 있는 숲은 결코 그런 집을 지은 적 없어 새장 같은 집을 그릴 때마다 영혼을 설계하는 목수처럼 종달새가 날아와 얼기설기 엮은 노래로 담을 쌓는 집,   수백 년 묵은 팽나무가 지탱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