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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새벽/ 강인한

어느 새벽     강인한    깊 은 강 잔잔한 물소리 들린다  내 곁에 잠든 아내.   내가 당신 속을 끓게 한 말들  당신이 나를 미치게 한 옛날도   더러는 굽이치는 흐름이었네.   가난하고 순한 젊음에 반짝  이 새벽 촛불 하나 드리고  싶다.   우리 집 세 마리 토끼를 위해  공판장에서 과일을 머리에 이고 오던 걸음  오명가명 한 시간.   어머니 떠나시고  장독의 상한 간장 죄다 바가지로 퍼내 버린  아내의 가을도   함께였다, 50년······     -전문(p. 48)  -------------------  * 『시로여는세상』 2024-여름(90호)호 시> 에서  * 강인한/ 1967년⟪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장미열차』등 12권, 시선집『당신의 연애는 몇 시인가요』,비평집『백록..

죽도록, 중랑천/ 이소연

죽도록, 중랑천      이소연    여름엔 속이 훤히 보인다  당신이 그만큼 맑다는 뜻이다   어디 모래가 많은지  어디 안장 없는 자전거를 버렸는지  내가 다 안다고 믿는다  당신이 이렇게나 맑은데  모르면 다 내 잘못이겠지  기록하지 않는 이 밤 어디쯤  물고기 떼처럼 리듬체조를 한다   기록하지 않는  이 밤 어디쯤에서   당신은 나를 비난한다  잔소리 좀 그만해!  그런데도 우리는 중랑천을 걸으면서  '다정한 것이 무엇일까'  '다정은 어떻게 생겼나'   물소리가 소음이구나  불어난 중랑천이 장관이구나   여름이 흙탕이다  당신이 그만큼 엉망진창이란 뜻이다  속을 모르겠다   화낼 건 다 내고 싶다  사랑한다는 말은 믿을 게 못 된다   붉으락푸르락하는 것이 섞여 흐른다  6호 태풍 카눈이 지나..

2월 29일/ 이병일

2월 29일     이병일    그레고리력은 4년에 한번 2월 29일을 만든다  365일 5시간 48분 46초,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도는 시간인데  왜 빛은 어스레하면서 밝은 얼룩이 될까  지구의 사고방식은 반복이다  반복만이 빛이 없는 곳에도 숨을 내어준다   2월은 양분 뺏겨 쭈그러든 씨감자에게 숨을 숱인다  짓물러 썩어 가는데도 숨 막히는 뿔을 세우게 한다  밥알을 흘리면서 도시락을 까먹는 사람이  흘린 밥알을 몰래 주워 먹는 오후가 있듯  2윌 29일은 쥐띠 용띠 원숭이띠에 들어앉는다  들어앉는다는 것이 기쁜다   오늘은 내가 죽어 달이 없는 날이다  그 어떤 것도 해코지를 하지 못할 것만 같다   달도 하필 이 순간에 죽고  나 없는 세상에서 2월 29일이 돌아왔다  울타리 넘어 돌아오지 ..

강명수_시인은 외모보다 내면의 자신감에서···(발췌)/ 자화상 : 노천명

자화상      노천명(1912-1957, 45세)    오 척 일 촌 오 푼 키에 이 촌이 부족한 불만이 있다. 부얼부얼한 맛은 전혀 잊어버린 얼굴이다. 몹시 차 보여서 좀체로 가까이하기 어려워한다   그린 듯 숱한 눈썹도 큼직한 눈에는 어울리는 듯도 싶다마는···    전시대前時代 같으면 환영을 받았을 삼단 같은 머리는 클럼지한 손에 예술품답지 않게 얹혀져 가냘픈 몸에 무게를 준다. 조그마한 거리낌에도 밤잠을 못 자고 괴로워하는 성격은 살이 머물지 못하게 학대를 했을 게다   꼭 다문 입은 괴로움을 내뿜기보다 흔히는 혼자 삼켜 버리는 서글픈 버릇이 있다. 삼 온스의 살만 더 있어도 무척 생색나게 내 얼굴에 쓸 데가 있는 것을 잘 알건만 무디지 못한 성격과는 타협하기가 어렵다   처신을 하는 데도 산도..

불구경/ 옥인정

불구경      옥인정    불 났어요  불 났어요  큰 불이 났어요   불빛은 알록달록해요  빨강  노랑  초록  배우고 있어요   팔도 사람들이 몰려와요  불 색깔에 맞추어  오색 옷들을 갖추어 입고  누군가 불 지른 가을 산  불구경 다녀요    -전문(p. 154)  ----------------  * 반년간 『미당문학』 2024-하반기(18)호 > 에서  * 옥인정/ 전남 무안 출생, 2023 『미당문학』 신인작품상 동시 부문 당선

동시 2024.09.01

이구한_실존의식과 존재의 현상(발췌)/ 국어선생은 달팽이 : 함기석

국어선생은 달팽이      함기석    당나귀 도마뱀 염소, 자 모두 따라해!  선생이 칠판에 적으며 큰소리로 읽는다  배추머리 소년이 손을 든 채 묻는다  염소를 선생이라 부르면 왜 안 되는 거예요?  선생은 소년의 손바닥을 때리며 닦아세운다  창 밖 잔디밭에서 새끼염소가 소리친다  국어 선생은 당나귀  국어선생은 도마뱀  염소는 뒷문을 통해 몰래 교실로 들어간다  선생이 정신없이 칠판에 쓰며 중얼거리는 사이  염소는 아이들을 끌고 운동장으로 도망친다  아이들이 일렬로 염소 꼬리를 잡고 행진하는 동안  국어선생은 칠면조  국어선생은 사마귀  선생이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며 소리친다  당장 교실로 들어오지 못해? 이 망할 놈들!  아이들은 깔깔대며 더욱 큰소리로 외쳐댄다  국어선생은 주전자  국어선생은 철..

담쟁이/ 송하선

담쟁이      송하선    담쟁이는  벽인지 나무인지도 모르고  한평생 기어오르고 있었네   벽인지 나무인지  교회의 첨탑인지도 모르고  무언가 구원의 손길을 찾아  한평생 기어오르고 있었네   그렇지만 이제  허위 허위 더는, 힘겨워서 더는  기어오를 곳이 없게 되었을 때  담쟁이는 그때 비로소 알았네   그를 구원해 줄 수 있는  신神은  그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전문(p. 114)    ----------------  * 반년간 『미당문학』 2024-하반기(18)호 > 에서  * 송하선/ 1938년 전북 김제 출생, 1963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 1971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유리벽』외 11권, 저서『시인과 진실』외 13권

아이히만은 유대인 집단학살에 대한 책임을 맡음으로써/ 나호열

아이히만은 유대인 학살에 대한 책임을 맡음으로써     나호열    제2차 세계대전(1939-1945, 6년 동안) 때 나치의 유대인 집단학살 정책 가담자로 이스라엘에서 교수형 되었다. 1942년 나치 고위관리로서 아이히만(1906-1962, 56세)은 유대인 학살에 대한 책임을 맡음으로써 사실상 '마지막 해결책'의 집행자가 되었다. 그는 유대인을 식별하고 집결시켜 그들을 집단 수용소로 보내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전쟁 뒤 아이히만은 미군에 붙잡혔으나 1946년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했다. 이후 몇 년 동안 중동지역을 전전하다가 1958년 아르헨티나에 정착했다. 나치 전범 추적자 지몬 비젠탈과 아스라엘 '자원봉사' 단체에 의해 정체가 드러나 1960년 5월 11일 부에노스아이레스 근처에서 체포되어 9일 뒤 비..

한 줄 노트 2024.09.01

연두색 띠/ 최금녀

연두색 띠     최금녀    내 첫 시집은  뻐꾹새 우는 초여름  호박밭에서 호박잎 이슬을 품는 연희동 언덕  한복 할아버지가 따주신 애호박 색깔  연두색 띠를 둘렀다   애호박 썰고 된장을 넣으면  이슬 보글거리고 햇볕 우러나  제법 괜찮은 맛이라고  오래 다닌 방앗간에 하나  채소 가게에 하나  미장원에 하나  지물포에 하나  동창회 총무에게 하나   연두색은 오래 가지 않았다  호박잎에 검은 점이 박히는 가을  폐업이라고 써 붙인 문을 열고  방앗간 그 여자  이슬 마르지 않은 연두색을 받던 그 손으로  내민 검은 비닐봉지  우리 폐업했어요   카페로 바뀐  방앗간을 지날 때마다  검은 비닐봉지 속에서  중얼거리는 고춧가루의 소리를 듣는다     연두색이 참 예뻤어요      -전문(p. 138-..

빛나는 아침의 이야기/ 박형준

빛나는 아침의 이야기      박형준    눈 많이 내린 아침결엔  지붕에 올라가  들판을 내려다보았다  머리위 눈발을 털며  들판에서 잠을 자다 일어나는 새들의  날갯짓을 흉내 내었다  담벼락에 기댄  삽에 쌓인 눈이 흩날리며  햇빛에 떠다니는 모습 바라보았다  마을로 날아온 아침 새떼들이  첫 발자국을 찍고 있는 건너편 지붕들을  하나하나 헤아렸다  새들의 울음소리 들으며  친구들이 떠나갈 때  손 흔들던 환영에 빠지곤 하였다  나도 언젠가 마을을 떠나겠지만  새들이 첫 발자국을 남긴  햇빛으로 가득한 아침 지붕의 빛나는 눈의 언어로  내 이야기를 써나갈 날이 오리라 기대했다     -전문(p. 110)   ----------------  * 반년간 『미당문학』 2024-하반기(18)호 > 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