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의 하트/ 정숙자 태양의 하트 정숙자 검은 새를 먹었다 검은 새가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럴 때 생각은 깃털보다 유용하다 검은 새의 생각이 내 중심에 연결된다 <검은 새와 나> 우리의 생각은 이제 방목이 아니다 의지에 따라 고삐를 잡는 심사와 숙고 검은 새가 잘 소화되도록 검은 새가 (어둠을 주시.. 제9시집· 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 2012.07.11
관, 이후/ 정숙자 관, 이후 정숙자 무덤, 거기서부터 잣대가 투명해진다 과거의 별에게 특혜란 없다 퇴고하지 못한다. 더 이상 신작을 발표하지도 못한다. 그에게 바쳐졌던 초저녁과 꽃들이 회수된다. 단단히 구 멍 뚫리는 뼈. 오늘의 비평서적 안에서 그의 뼈는 뼈를 놓친다. 무덤이 열렸다고 말할 뻔했다... 제9시집· 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 2012.06.05
풀의 행성/ 정숙자 풀의 행성 정숙자 수레가 풀을 깔고 지나가네 관절 부서지는 굿, 꽃봉오리 터지는 바닥, 두개골 나뒹 구는 길, 비명 움켜쥐고 감은 눈동자…, 벌레들이 삼가 초 혼가를 부르네. 풀이여 풀잎이여 풀줄기들이여 일어섭시다 풀답게 풀뿌리답게 일어섭시다 다시 일어나 흰 꽃, 붉은 꽃, 노란 .. 제9시집· 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 2012.06.05
몽돌/ 정숙자 몽돌 정숙자 나는 이미 유골이다. 나는 이미 골백번도 더 유골이다. 골백번도 더 자살했고 골백번도 더 타살됐고 그때마다 조 금씩 더 새롭게 어리석게 새롭게 어리석게 눈떴다. 파도야, 보이느냐? 파도야, 보이느냐? 나는 항상 유골이다. 살았어도 죽었어도 떠도는 유골이 다. 나는 골백.. 제9시집· 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 2012.06.05
파란 피아노/ 정숙자 파란 피아노 정숙자 길은 밤에 조율된다 온종일 밟히고 긁혀 느슨해진 건반들 깊고 달콤한 어둠에 안겨 아침을 복원한다 (어느 날, 산책로에서 발치에 떨어진 건반 몇 개를 봤다 곰곰 응시하자 길바닥이 점점 투명해지며 끝없이 깔린 건반이 드러났다. 한 걸음 두 걸음 내디디는 걸음걸음.. 제9시집· 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 2012.05.12
활엽수의 뇌/ 정숙자 활엽수의 뇌 정숙자 저 나 무는 그 나 무가 저 나무는 아니라네 겨우내 잉태했다네 새로 태어날 자기 자신을 바람살… 어둠길… 얼음판…가로지를 때 벼리던 칼날 녹이고 녹여 거문고 만들었다네 거문고 만들었다네. 공명상자 가득 그득히 성벽 없는 봄만을 길러… 낳고, 낳고, 연년세세 .. 제9시집· 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 2012.05.12
정숙자 시집 『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비대칭 반가사유상」/ 작품론 : 강영은 『미네르바』2012-봄호 [미네르바 셀렉션]/ 강영은(시인) 비대칭 반가사유상 정숙자 한 칸 때문에 엎드릴 것이다 깎고 팔 것이다 바람을 키울 것이다 한 칸 때문에 뒤척일 것이며 물렁뼈 깊어질 것이다 휙휙 휙 머리 날아갈 것이다 맑은 강 바라기도 할 것이다 (그 한 칸이야 기둥이었다.. 제9시집· 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 2012.02.28
십 년 후의 메모/ 정숙자 십 년 후의 메모 정숙자 피로써 풍선을 불지 말아라 절규도 피로써는 하지 말아라 의지의 문제가 아닌 역류 이안류 잔물결까지 우주 어디선가 명멸하는 별들의 중력에 의한 파장이며 진행인 것을, (우주시간에 견준) 지구시간은 순식瞬息이란다. 내 피는 어머니의 피. 내 모든 피는 어머.. 제9시집· 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 2012.01.23
누 떼의 도강이 그리 처절한 것은 그들에게 핸드백이 없기 때문이다/ 정숙자 누 떼의 도강이 그리 처절한 것은 그들에게 핸드백이 없기 때문이다 정숙자 인간인들 핸드백 없이 아프리카 초원에 던져진다면 누 떼보다 나을 리 없다 우리의 삶도 거뜬한 건 아니지만 그들의 도강은 왜 그 리 시퍼런 행려도일까. 가젤, 임팔라, 벌새보다도 그들의 지평은 거칠고 차다. .. 제9시집· 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 2012.01.12
굿모닝 천 년/ 정숙자 굿모닝 천 년 정숙자 칸트가 될까 했더니 이미 칸트가 있다 이상이 될까 했더니 이미 이상이 있다 피 이상의 피 흘려볼까 했더니 이미 십자가를 세우고 간 자가 있다 사과 한 알 째려볼까 했더니 이미 이브가 따 먹었을 뿐 아니라, 아기 낳는 일까지도 전혀 새롭지 않은 것으로 만 들어버.. 제9시집· 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 2011.1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