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한 편 346

조재형_산문집『말을 잃고 말을 얻다』/ 부안 사람들

부안 사람들 조재형 한 고장을 아는 법은 거기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일하고 어떻게 사랑하고 어떻게 늙어 죽어 가는가를 알아보는 것이다, 고 하였다. 크고 오래된 바다를 끼고 있는 이 고장은 노을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일들은 많이 하지만 꼭 부자가 되겠다는 욕심 때문에 그러는 건 아니더라. 이곳 사람들은 무엇보다 시가詩歌에 대한 관심이 유별나더라. 혈혈단신으로 살다가 젊으나 젊은 나이에 거문고와 함께 묻힌 일개 기생 매창의 무덤을 500년 넘게 지켜온 그들이더라. 죽어 없어진 천한 신분의 무덤을 단지 시인이 남기고 시詩 때문에 온 고을 사람이 통틀어 지켜왔다는 예를, 나는 일찍이 동서고금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러니 매창의 흔적을 찾아보지 않고서 부안을 다녀갔다고 자랑하는 건 참으로 민망한 일이..

에세이 한 편 2023.11.05

조재형_산문집『말을 잃고 말을 얻다』/ 문전박대당한 그분

문전박대당한 그분 조재형 수사관으로 처음 임용됐을 때 나 역시 승승장구하여 국장까지 승진하고 명예롭게 퇴직하는 꿈을 꾸었다. 정년을 마친 다음 가족들 손잡고 황혼을 누리는 노년을 설계했던 것이다. 하지만 뜻밖에 찾아온 사적인 불행은 내가 검찰을 일찍 떠나도록 당초의 계획을 수정시켰다. 내가 중도 사직의 결심을 처음 밝혔을 때 가족들은 완강히 반대했다. 십수 년 공직의 울타리 안에서 수사만 해온 터라, 내가 재야에 뛰어들어 제대로 헤쳐 나가기 어려울 거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직으로 굳힌 내 마음을 누군들 되돌릴 수 없었다. 나는 그때 모든 걸 내려놓고 빈손으로 시작해야 하는 처지였다. 가족과 친지의 동정을 한 몸에 받는 신세였던 것이다. 나는 한숨으로 보내기보다는 담대한 도전 앞에 선 나를 다독였..

에세이 한 편 2023.11.05

신지식인 외 1편/ 조재형

신지식인 외 1편 조재형 나는 알고 있습니다. 목숨 한 그루 꺾는데 몇 발의 저주가 필요한지. 하지만, 나는 모릅니다. 기도를 사다리로 사용하면 신이 낮은 데로 임할 수 있는 줄은. 나는 알고 있습니다. 적의 심장을 초토화시키는 데 충분한 플류토늄의 양을. 하지만, 나는 모릅니다. 사계절을 지키는 민들레의 노란 전구를 누가 켜놓았는지. 나는 알고 있습니다. 어떤 말을 비수로 꽂으면 라이벌이 폭삭 무너지는지. 하지만, 나는 모릅니다. 숲속의 새들은 어디서 울음을 채워 오는지. 나는 알고 있습니다. 얼마나 조명을 낮추고 어떻게 흥정을 붙여 노래방의 치마를 벗기는지. 하지만, 나는 모릅니다. 갈대가 어떻게 바람과 합치하여 가을 한 철을 저술하는지는. 나는 알고 있습니다. 어떤 겁박으로 무지한 의뢰인들의 지갑이..

에세이 한 편 2023.11.04

문학이 나아가는 길/ 조병무

문학이 나아가는 길 조병무 육십여 년 문학의 길을 걸어오면서 생각나는 것이 있다. 나는 오래전에 호금조胡錦鳥라는 새 한 쌍을 길렀다. 깃이 퍽 아름답고 그 색채도 화려한 놈이라 많은 사람들이 귀여워하는 새였다. 아침저녁으로 노래하는 소리는 구슬이 구르는 듯, 은은한 빛깔의 소리를 들려주었다. 애지중지 기르던 이 새의 수놈을 내가 그만 죽게 한 일이 있다. 그것은 나의 실수에 의한 것이었다. 바퀴벌레 몇 마리가 새장 바닥을 기어다니기에 그 새를 다른 새장에 옮기고 살충제를 뿌려야 되는 것을 그 순간 귀찮은 생각에 새를 넣어둔 채 살충제를 바닥에 살짝 뿌렸다. 그리고 그 모래 위에 신문지를 깔아주려고 하는 순간 수놈이 바닥에 내려와 모래를 한 입 물었다. 순간 호금조 수놈은 파드닥거리며 죽고 말았다. 그렇게..

에세이 한 편 2023.11.04

첫눈/ 배홍배

첫눈 배홍배 "~!@#$%^&* .,#@$!%~^&" 하늘을 향해 소릴 쳤지만 대답이 없다 얇고 차갑게 쌓인 눈밭 잘린 배추 그루터기들 위로 눈가루만 소리 없이 뿌려지고 있었다. 오늘은 김장하는 날, 아침 일찍 일어나 배추밭에 나왔다. 퇴직하고 텃밭 30평을 얻어 처음 키운 배추들을 누군가 몽땅 훔쳐 갔다. 아내의 속살 같은 보드라운 흙을 뚫고 눈을 내밀던, 내 새끼들 같던 배추들이 사라졌다. 허공중을 향해 소리소리 물었다. 그때 휴대폰 벨이 울렸다. "선상, 배추 가져가. 어젯밤 배추들을 뽑아 창고에 넣어 두었어. 눈 맞으면 배추 버리는 거여···." 부드러운 눈송이 같은 텃밭 주인 할머니의 목소리가 하늘에서 내렸다. -전문(p. 362) -------------------------- * 배홍배_산문..

에세이 한 편 2023.10.24

배홍배_산문집『내 마음의 하모니카』/ 도다리 쑥국

도다리 쑥국 배홍배 김충규 시인과 함께 통영에 내려간 적이 있었다. 그가 김춘수 문학상을 수상할 즈음이었을 것이다. 서울에서 자동차로 여섯 시간 이상이나 달리는 내내 우린 서로 말이 없었다. 물이 잔잔한 바닷가나 산기슭에서 아무렇게나 불어오는 봄바람이나 꽃잎들의 가벼운 귓속말에 우리의 귓바퀴도 함께 얇아지고 있었다. 미처 열매를 맺지 못하고 떨어져 흐르는 어린 꽃잎들이 하늘하늘 날리는 산길과 바닷길을 돌아가며 달리는 코란도 승용차의 엔진은 때로는 하늘을 행해, 바다를 향해 그리고 누군가를 향해 뭔가 중얼거리듯, 투덜거리듯 달렸다. 그것이 어떤 이의 운명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라는 걸 알 수도 있었을 터인데 바다는 조용했고, 어스름이 내려오는 산길 도로는 발자국도 없이 사람과 사람을 지는 햇빛의 운명 속..

에세이 한 편 2023.10.23

배홍배_산문집『내 마음의 하모니카』/ 잘 가게, 친구

잘 가게, 친구 배홍배 유명인들이 죽음을 암시하는 작품이나 글을 남기고 갑자기 세상을 뜨는 경우를 종종 본다. 가수 배호가 '마지막 잎새'를 부르다 갔고, 차중락이 그랬고 김정호가 그렇게 갔다. 김충규 시인은 '장례식'을 쓰고 갔다. 그 죽음이 고인들 스스로 예견한 일이었거나, 아니었거나 관계없이 일반 사람들에겐 일종의 신화 같은 사건으로 받아들여진다. 신화는 밝은 것이 아닌 어슴푸레한 빛의 배경을 갖는다. 김충규 시인의 얼굴빛은 늘 어두웠고 그가 바라보는 것들은 더 어둡게 그늘졌다. 그의 눈빛에 바랜 것들은 하이포그램적 어둠의 완성이었다. 그의 죽음이 확실한 것으로 받아들여질수록, 그의 빈자리가 터무니없을수록 그의 어둠은 그가 떠난 새벽보다 투명해졌다. 그의 죽음은 생물학적 소멸이 아닌, 남겨진 사람들..

에세이 한 편 2023.10.23

차주일_산문집『출장보고서』/ 손흥민 정신

손흥민 정신 차주일 바람 없이 흔들리는 물방울을 마를 때까지 지켜본 적 있다. 둥근 수막에 햇빛 한 점이 찍혀 있다. 지구가 해를 들이기 위해 자전하듯 물방울이 햇빛 한 점을 들이기 위해 오대양의 파도와 육대주의 등고선처럼 흔들렸다. 물은 자신의 성분과 상극인 햇빛을 들임으로써 사라지는 존재였다. 상극과 대치함으로써 나를 사라지게 하는 게 새롭게 태어나는 것임을 보았다. 햇빛도 물도 함께 사라졌지만, 물의 후생과 빛의 후생은 얼룩으로 하나였다. 얼룩은 태막이 터진 모습이었다. 그때 보이지는 않았으나 정신 같은 무형이 태어난다는 걸 알았다. 범종 소리가 맥놀이로 흔들리고 있었다. 파형이 다른 두 흔들림이 서로 성부聲部를 내어주고 선율을 받아들이며 하나의 소리로 퍼지고 있었다. 사람의 고막으로 들을 수 없는..

에세이 한 편 2023.10.13

차주일_산문집『출장보고서』/ 'ㄹ'이라는 슬픔

'ㄹ'이라는 슬픔 차주일 핸드폰 잠금장치 암호로 'ㄹ'을 모신다. 이를 본 지인이 참 간단하게도 설정했노라 말했지만, 나에게 기호 'ㄹ'은 가장 복잡하고 긴 감정이며 가장 성스러운 상징이다. 딸 셋을 둔 어미가 천일기도 끝에 넷째를 낳은 날이었단다. 세상에 그토록 가슴을 졸인 날이 없었다고 한다. 장손인 나를 낳고서 시부모로부터 절대 신뢰와 무한 사랑을 얻으셨다는 말씀이 있었으니, 아들 선호가 절대 명제이던 1차 농경 산업 시대, 첫아들을 기다리던 어미의 기도문을 알듯도 하다. 어미는 아들 형제 없이 딸만 둘인 집안에서 열다섯에 시집살이를 떠나야만 했다고 한다. 어린 딸을 시집보낸 외할머니는 사돈댁 동네 어귀에 쪼그려 앉아 묵정밭을 일구는 어린 딸을 지켜보다 돌아가곤 했다고 한다. 내 어미의 어미가 백일..

에세이 한 편 2023.10.13

박덕은_수필집『바닥의 힘』/ 기다림의 미학

기다림의 미학 박덕은 죽녹원에 들어서자 흔들리는 댓잎 위에서 햇살이 리듬을 탄다. 대숲 바람 소리가 만져진다. 채워진 듯 비워진 듯 맑고 깊다. 황 기사의 미소가 아직도 거기에 남아 있는 듯. 30여 년 전, 백여 평 남짓한 목욕탕을 운영한 적이 있었다. 황 기사는 그곳에서 남탕과 보일러실을 관리했다. 그는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대학을 잠시 휴학하고 있었다. 작달막한 키에 대나무의 곧은 줄기 같은 갈비뼈를 드러내며 목욕탕 바닥을 청소했다. 여문 소리의 단소처럼 단단한 목소리로 노래를 하며. 많은 사람들이 때 절은 시간을 밀기 위해 목욕탕에 들어서면 그는 소란스런 몸짓으로 바빴다. 손님이 원하면 때를 밀어주기도 했는데 아이들과 장난치며 놀기를 더 좋아했다. 등에 아이들을 태우고 푸른 지느러미 같은 팔다리..

에세이 한 편 2023.09.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