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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19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19 정숙자 고독도 풍금風琴이랍니다. 어떤 고뇌도 맑아질 수 있도록 많은 건반을 갖고 있지요. 어느 날의 풍랑이 깨운 비애는 하늘까지 적신답니다. 딩 동 댕 동 저는 오늘도 풍금 앞에 앉아서 오로지 마음을 ᄁᆞᆩ는답니다. (1990. 7. 25.) _ “우리는 한 점 티끌 위에 살고 있고 그 티끌은 그저 그렇고 그런 별의 주변을 돌며 또 그 별은 보잘것없는 어느 은하의 외진 귀퉁이에 틀어박혀 있음을 알게 됐다.”(칼 세이건, 홍승수 옮김, 『코스모스』, 2004, 사이언스북스, 46쪽) 기억 속의 저 한 구절을 찾기 위해 몇 시간을 소비했다면, 과거로의 여행을 한 셈이겠지요. 독서 노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 세월 의식의 흐름 속에서 이미지가 변신해버린 까닭에 그 과정까지를 더듬..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18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18 정숙자 포장도로는 대지에 풀린 비단이지요. 날 듯 달리는 버스 안에서 그 아래 노동을 생각합니다. 지금도 어디선가 누군가는 비단 필 이어내느라 허리와 ᄄᆞᆷ을 바치고 있을 텐데, 먹고 입고 기거하는 삶의 모두가 남의 ᄄᆞᆷ 빌린 것인데, 이런 사람은 과연 무엇으로 그 빚 다소나마 갚고 떠날 수 있을까요. (1990. 7. 25.) _ 조금만 기울어도 흘러버리는 물 그 흐름으로 만물을 살게 하는 물 수평을 유지하기가 얼마나 힘든 일인가 알려주는 물 그 물이 네 마음 안에 있다는 것 또한 일러주는 물 그리고, 그 물이 진짜 물이라는 물 물은 어떤 물이든 가ᄍᆞ가 없다고 말하는 물 그래서 더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물 -전문(p. 23) ♣ 시작노트 나는 농촌에서 태어났고 초..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11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11 정숙자 슬픈 추억은 숨어 있어도 좋으련만, 질투라도 하는 양 되돌아와 모처럼의 행복을 그르치고 맙니다. 하지만 목메어 젖어버린 이 꽃다발이 제게는 진짜 꽃ᄃᆞᄇᆞᆯ입니다. (1990.7.10.) _ 카를로 로벨리(이탈리아, 1956~)의 양자 얘기는 우리에게 하 많은 자유를 가능케 해주었습니다. 30여 년 전의 저 공간에서, 그 이전에서라도 저는 폭 고꾸라져 죽었던 건 아닐까요? 죽은 줄도 모르고 허청허청 걸어온 육체가 아닐까요? 웬일인지, 여기가 꼭 커다란 무덤처럼 느껴질 때가 있단 말입니다. -------------- * 『문파 MUNPA』 2022-여름(64)호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10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10 정숙자 지렁이한테도 운명이 있음을 바라봅니다. 철조ᄆᆞᆼ에 걸린 그의 시신이 걸음을 놓아주지 아니합니다. (1990.7.8.) _ 새롭게, 새로운 흐름 속으로 이 이 저 이 앞다투어 합류하는 강 도리어 홀연 귀거래혜歸去來兮 지었던 묵객도 얼비치는 강 ‘풀리는 한강가에서’* 해 질 녘 서울 하늘을 뜯어봅니다 - 전문- * 서정주의 시 「풀리는 한강가에서」 -------------- * 『문파 MUNPA』 2022-여름(64)호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9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9 정숙자 어디에도 팔지 못한 눈물이 노래가 되었습니다. 지난날 흘린 피만큼이나 붉고 푸른 한밤의 노래…. 조각달에 한두 자尺 실었사오니, 산들바람 뜨락에 서성이거든 당신의 작은 ᄎᆞᆼ문을 조금만 조금만 열어주세요. (1990.7.6.) _ 저렇게 기도하던 날이 있었구나 뮤즈를 향해 간절히! 그거 하나를 스승은 날 믿으셨는지도 몰라 -------------- * 『문파 MUNPA』 2022-여름(64)호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8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8 정숙자 사랑은 노상 저를 버리고 당신한테로 달려갑니다. 새가 껍질을 버리고 창공으로 날아가듯이. 붙잡고 가두어도 소용없는 일, 한 번 떠난 제 마음은 한뎃잠을 ᄊᆞᇂ으며 돌아오지 아니합니다. 꿈엔 듯 스치우는 바람결에 앞산 뒷산 가랑잎 부서집니다. (1990.7.6.) _ 타고르와 릴케와 헤세를 읽던 시절 흰 벼루와 까만 먹과 창백한 갈필이 그립습니다. -------------- * 『문파 MUNPA』 2022-여름(64)호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7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7 정숙자 매일 마음으로 쓰는 편지는 어떤 새가 당신께 전해주나요? 기도의 봉투에 곱게 쌌지만 주소도 우표도 없는 편지를 당신의 우체부는 눈이 밝아서 이름자만 보고도 길을 아나요? 단 ᄒᆞᆫ 번 눈 속에 피는 흰 꽃을 넣어 보낸 편지도 받으셨나요? (1990.7.5.) _ 슈뢰딩거의 상자 속에 넣어두었던 세월 저쪽의 고양이가 어찌 됐나 뚜껑을 열어봤더니, 아직도 어리디어린 그대로의 눈으로 저를 올려다보고 있었습니다. -------------- * 『문파 MUNPA』 2022-여름(64)호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1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1 정숙자 슬픔은 저를 데리고 당신 계신 곳으로 떠납니다. 저의 재산은 눈물뿐이온데 그것도 당신께 예물이 되오리이까. (1990.6.22.) _ 앞 문장으로부터 32년 하고도 4개월 이틀이 지난 오늘(2022.2.24.)입니다. 훈민정음 해례본처럼 끈으로 묶어 놓은, 자신만이 아는 한 권의 시집 『공우림의 노래』를 몇 개월 전 이삿짐 속에서 발견했습니다. 일련번호만이 제목인 79편의 저런 독백이 지은 날짜의 기록과 함께 묻혀 있었던 것입니다. ‘공우림空友林’은 그 무렵 제가 스스로 지은 당호堂號입니다. 그때도 저의 재산은 눈물뿐이었던가 봅니다. 30여 년간 새로운 새로운 지평을 찾아 골몰했습니다만, 아무렇지도 않은 저 한 줄이 왜 이리 조용히 아늑한지 모르겠습니다. --------..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2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2 정숙자 침묵과 당신과 저는 사유 안에서 하나가 됩니다. 빛으로 담을 친, 이 고요는 얼마나 오랜 사원입니까. (1990.6.22.) _ 약하면 밟히고, 강하면 꺾이고, 부드러우면 얽히고···, 이도 저도 아니면 묻히는 그런 세상에 맑고 따뜻한 호수 하나가 있어, 돌을 던져도 칼날을 빠뜨려도 회초리로 막 후려도 그래 그래 네 마음 안다 알고 말고···, 울지 말아라 둥그런, 둥그런 그 한마디 동심원을 읽었습니다. -전문- * -_- : ‘감중련’을 뜻하는 필자의 新造 기호. -------------------- * 『엄브렐라Umbrella』 2022 · 봄-여름(3)호

먼 곳에서 도는 새벽

먼 곳에서 도는 새벽 정숙자 열 달 동안이나 덮어놓고 살았어 시 한 줄 쓰지 않고 (ㅎㅎ) (ㅋㅋㅋ) 그렇게 살았다면 아무것도 안 한 거지 보이지 않는데 느껴지지 않는데 잡히지도 않는데 썼다면, 그건 억지였거나 헛것이거나 사기였겠지 열린 열 시에도 유리창 너머 리기다소나무 하염없이 바라보며 누워있을 수 있는 자유. 일상에 대한 강박 없이 퍼져버릴 수 있는 멈춤. 그 늘어진 자유의 무거움을 아는 친구는 그리 많지 않을 거야. 침묵밖에 남은 게 없는 공간을 (ㅎㅎ) (ㅋㅋㅋ) 무작정 견디었지만 억지였거나 헛것이거나 사기였거나 어쨌든 써야 했을까 카지노에 빠진 게이머와는 다르니까 우리에게 시는 인생이니까 다시 세워야 할까 다시 일으킬 수 있을까 당장은 불이 안 붙고 타닥거릴지라도 나중에는 중심을 잡고 타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