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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병 속의 피

꽃병 속의 피 정숙자 진전을 내재한다 견딘 만큼 비옥해진다 고뇌가 덜리면 사유도 준다 그 둘로 인해 지속적으로 연역/발아하는 깊이와 빛을 질투하는 신은, 회수한다 (진정 고독을 사랑할 무렵) 그렇다고 잃어진 그것을 위조해 가질 순 없다 저쪽, 또는 우연만이 생산/보급하는 그것은 캄캄하지만 자칫 죽음에 이를 수도 있지만 결국 깨고 보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혹자만의 혹자를 위한 그 두껍디두꺼운 어둠 속 광학, 두 번 다시 얻을 수 없는 석벽의 삶 속의 앎 ---------------- * 웹진 『공정한 시인의 사회』 2020-8월호

내 안에 누군가 내 안에

내 안에 누군가 내 안에 정숙자 살고 있다 움직이고 있다 그는 나보다 먼저 내 앞을 본다 한 치 앞이든, 하루 앞이든, 한 달 앞이든, 일 년 앞이든 아주아주 먼먼 생의 끝까지라도 그는 보고 있고, 알고 있고 ∴ 행동한다 그가 유추하고, 결정한 의지는 곧바로 내 일상에 적용된다 ∴ 나는 그의 사역동사다 내가 잊어버린 말이나 발자국 표정에 이르기까지, 그는 모두 기억하고 소유한다. 깨지거나 퇴색하지도 않는, 과거들··· ···을 그렇게도 면밀히 관리-편집하며,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선택지를 올려보내는 그는 누구일까. 없는 내 안에 사는 그를, 이제야 어렴풋이 알 것 같다. 내가 모르는, 나를 너무나도 잘 아는 그가 인드라망을 보살피며 엮어가며 (잠들지도 않고) 전후좌우 쌓이는 눈을 쓸어주고 있었던 거다. ..

동역학

동역학 정숙자 하나둘 우물이 사라졌다 마을과 마을에서 '깊이'가 밀려난 것이다 우물물 고이던 시간 속에선 두레박이 내려간 만큼 물 긷는 이의 이마에도 등불이 자라곤 했다 꾸준히 달이 깎이고 태양과 구름과 별들이 광속을 풀어 맑고 따뜻한 그 물맛이 하늘의 뜻임을 알게도 했다 하지만, 속도전에 뛰어든 마을과 마을에서 우물은 오래가지 못했다 노고를 담보하지 않아도 좋은 상수도가 깔리자 물 따위는 쉽게 쉽게 채우고 버릴 수 있는 값싼 거래로 변질/전환되었다 엔트로피의 상자가 활짝 열린 것이다 가뭄에도 사랑을 지켰던 우물 속의 새 언제 스쳐도 깨끗하기만 했던 우물물 소리 그런 신뢰와 높이를 지닌, 옛사람, 무명 옷깃 어디서 다시 만날까 그리고는 우물가에 집짓고 살까 ------------------- * 『시인동..

이슬 프로젝트 - 51

이슬 프로젝트 - 51 정숙자 비둘기 안녕/ 우리 동네 산책로에 플래카드가 내걸렸다. “비둘기들에게 먹이를 주지 않는 것이 환경에 적응하게 하는 동물 사랑입니다” 저 문구를 대할 때마다 과연 내가 잘하고 있는 것인가.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는 행위가 오히려 비둘기에게, 또는 주민들에게 해를 끼치는 일은 아닌가, 작년 7월부터 고민해 왔다. 그러니까 작년 7월에 저 플래카드가 등장했던 것이고, 고민의 요인인즉 강요가 아닌 권유형 구호였기 때문이다.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지 맙시다, 라든가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면 엄벌에 처합니다, 라든가 비둘기들이 전기 합선을 일으키며, 병원균도 퍼뜨릴 수 있습니다, 쯤의 지시였다면 내 오랜 친구들과의 마음-나눔을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설득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게 글의..

공간의 역설

공간의 역설 정숙자 바다일 필요는 없다 폭포나 강물일 필요도 없다 최소단위로 압축된 한 방울이면 족하다 그 한 방울의 초점을 열면 태양과의 합의로 이룬 도시가 한눈에 펼쳐진다 생명력 가득한 거리와 창문들, 신전, 정원··· 행인들까지가 옛 모습 그대로다 고통과 고뇌에 포위당한 날 촛불보다 먼저 꺼져버리고 싶은 날 밤조차 너무 희어, 눈감아지지 않는 날 내 아틀란티스 제1문의 열쇠는 비밀보다 단단히 여민 침묵과 눈물 그 중심에 있다 검붉은 그 슬픔 허물어- 허물어- 홀로 들어선 아틀란티스 그리운- 그리운- 그리운 하늘에 가라앉아버린 그러나 퇴색되지 않은, 그때 그대로의 아틀란티스 돌멩이도 새들도 내일로 달렸던 수레바퀴 소리도 씩씩하기만 했던 나의 아틀란티스 겨우 스물 무렵에 세··· 운··· 누군가의 뮤 ..

이슬 프로젝트-50

이슬 프로젝트 - 50 정숙자 1/10초 아끼기// 아낀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돌이고, 사랑한다는 것은 소중하다는 꽃이다. 내가 제아무리 온갖 사물을 사랑하고 아낀다 해도 오히려 지구의 은혜를 다 갚을 수는 없다, 고 평행이론 궤도의 누군가가 일러준다 나는 지금 그 말을 받아 적는 중이다 급할 때 엘리베이터 탔을 때 층 번호 누르기 전에 버튼을 먼저 누르면 1/10초 아낄 수 있다 독서 중 밑줄을 그어야 할 때 좌우 끝까지 긋지 않고 3~5㎝ 정도만 그어도 1/10초 아낄 수 있다 (전자는 며느리가 남편한테서 들은 정보를 내게 준 꽃이고, 후자는 나 스스로 감각/지각한 실천적 돌이다) 이런 내 일상이 좀 찌질한 느낌이지만, 별수 없지 나는 물리학자들의 예리를 경외하고 질투하거든. 원자-분자-쿼크에 이르기까..

철학사전

철학사전 정숙자 나 아직 태어나기 전 세상은 이미 한껏 밝았다 고통 사랑 전쟁도 더러 엎질러졌고 각종 발명품도 앞을 다퉜다 차가운 열정 풍성히 피어 질서가 길이 되고, 법이 평화가 되고, 더러는 굴욕이 권력이 되기도 했다 얼마나 많은 응시가 어둠을 실험했는지… 율리우스력이니 시공간도 휜다느니 앎보다 실천이라느니… 지표엔 색색 정의가 그득했지만, 그보다 더 깊었던 사람 겹겹으로 여위었기에 지금도 속속 어디선가 새로운 기원 움트고 있다 숭고하다고 말해도 될까? 하나뿐인 생명 하나에 걸고 간 이들 한 번뿐인 그림자 한 길에 묻고 간 그들 나 아직 젊기도 전에, 푸른 강변 찾기도 전에 그런 사람 그런 하늘 그러한 전설 지금도 우리 곁에 어딘가에 숨-은, 불-빛 -------------- * 『사이펀』 2020-..

백구과극(白駒過隙)

백구과극白駒過隙 정숙자 가드레일에 죽은 고양이가 걸쳐져 있다 어쩌다 저리 됐을까 누가 가져다 저래 놨을까 ······확인한 바 플라타너스 몇 잎이 말라붙은 나뭇가지였다 태풍에 찢겼나 보다 소용돌이치다가 끼었나 보다 작신 허리 꺾인 포즈를 하고, 너는 푸른 숨을 거두었구나 갈색으로, 검정으로, 아니 고양이로 변신했구나 난 풍장이 좋아 이 길과 저 하늘과 해 질 녘이면 늘 걸어오는 그대들의 말소리와 숨소리, 발자국 수북한 이 길을 택했어, 라고 말하지도 못하는내 길동무, 한 번 눈여겨 봐주지도 않았던 이파리들 가운데 한 잎이었던 잎, 무음이 돼버린 이제야 입 이 시대에 건성으로가 아니라 진정으로, 어둠으로 시를 쓰는 몇몇 시인이 있다 이 시대에 그 몇몇 시인이면 족하다 -------------- * 『문파 ..